언니 오는 날
임수진 지음 / 상상마당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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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소설집이라니 얼마나 더 각별할까 짐작하며 근래에 알게 된 단편 소설 하나씩 빼 먹는 즐거움을 기대했다소재들이 심상치 않아 기사나 에세이였음 마음이 무거웠겠다어쨌든 소설이라 다행이다 하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읽었다자전적이거나 주변 현실을 차용하거나 반영하는 글들임이 분명하니 여전히 현실에서 유사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을 이들에 대한 불특정한 생각에 기분이 점점 가라앉기도 했다간식이라 생각한 음식이 복용약인 듯한 심정.

 

뭘 어쩔 수 있을까이야기를 통해서라도 공감할 수 있는 사고와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고 변명하는 수밖에최선을 다해 살아도 남을 해하지 않고 살아도 속 깊이 선해도 마주해야 할 어려움들은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도 한다무감하고 가치 판단도 못하는 세상 살이가 눈물 겹지만 환하고 쨍한 여름타인의 그늘을 살피고 싶다는 저자의 소망이 담긴 문장을 계속 떠올리며 끝까지 읽었다.

 

오래 전 독일인 할아버지 한 분이 한국인들은 머리카락 색이 다 검은 건가라고 물어 갈색진한 갈색더 진한 갈색검정색 정도가 아닐까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최대한 사실적 정보를 전달하려고 한 의지였지만 말하다 보니 폭이 좁은 명도와 채도 사이의 다양성(?)에 슬쩍 웃음이 났다이 책에 담긴 10가지 이야기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을 준다채도가 흐린 어두운 명도의 나열과 같은 삶들웃을 수 있는 이유는 없다.

 

표제작으로 선택된 단편을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생각을 이겨본 적이 없다[언니 오늘 날]제목에서 일견 예상되는 반갑고 행복한 날일까.

 

이수는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보며 저 속에 혹시라도 엄마가 있다면불길에 갇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길을 잃는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미노타우로스처럼 엄마도 미궁에 갇힐 수 있다는 상상을 하자 캄캄한 동굴에서 빛 한줄기를 발견한 듯 마음이 환해졌다.”

 

언니는 범행을 자백하는 양심수처럼 담담하려고 애썼지만 얼굴은 강제 수용된 포로 같았다.

 

나가야 한다고 엄마 손을 잡았는데 그때까지 얌전하던 엄마가 또다시 난폭해졌어가면 네년이 죽일 거잖아... 하면서 내 손을... 마구 물어뜯었어. (..) 그래서... 두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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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아버지는 사고를 당했다. (...) 아버지는 그 사고로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늘 같은 방향으로 흐를 줄 알았던 이상이 방향을 180도로 틀어버렸다. (...) 고만고만하던 일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절망과 우울감이 진눈깨비처럼 쏟아졌다그날 밤 우리 가족은 급하게 써진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었다. (...) 웃음이 사라지면서 유쾌하지 않은 의무만이 서로의 어깨를 짓눌렀다. (...) 아버지에게서 살아있는 부분은 입뿐이었다.” [삼각김밥을 먹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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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인 엄마도 속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아이가 생긴 뒤 이혼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았다. (...) 지수는 딸이 아빠의 부재를 이해할 나이가 될 때까지 견디기로 했다. (...) 모범적인 가면 속에 숨긴 욕망이 더 무서웠다.” [푸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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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하는지 그 답을 못 찾았다미래가 암흑이라 탈출은 꿈도 못 꾸는데 가족을 만들라는 엄마가 제정신일까 싶다. (...) 그 삶이 순리고 태곳적부터 이어온 순환이라 할지라도 저항 없이 물려받긴 싫었다.” [메미의 시간]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어야 안심하는예외 수는 인정하지 않았다. (...) 면접에서 매번 떨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먹고 싸고 아르바이트하는 시간 이외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 사회에 나오니 더 중요한 게 많았다성적보다는 예외 수와 무리수를 사용할 줄 아는 친구들이 취직도 빠르고 승진도 빨랐다. (...) 개뿔개천의 용은 무슨원서를 넣는 곳마다 떨어졌다.” [매미의 시간]

 

첫 소설이라서인지, ‘첫 소설인데도인지 지루하지도 불편하지도 불쾌하지도 않게 잘 읽었다소설적 재미만 보자면 단연 재미있었다젊고 똑똑한 작가가 구사할 법한 이렇게 말하면 나이가 자각되지만 살짝 복잡하고 의도적으로 빗겨가고 설명을 늘린 표현들도 좋았다정확하고 진솔하고 과장 없고 가감 없는 담백한 문장들을 눈부시게 감탄하며 읽는 취향이지만 젊음도 지성도 반가웠다.

 

깨닫고 잊고, 의 반복이긴 하지만 다시... 사는 일은 이렇게 준열하고도 흥미롭다고 느꼈다모두 아프지만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그런 오만한 생각은 아예 깨끗하게 지워지면 좋겠다작가가 걷어낸 그늘이 있던 자리마다 한참 빛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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