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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1만 년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나무의 기쁨과 슬픔
발레리 트루에 지음, 조은영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평점 :
나무…… 좋아하시지요? 혹 나무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는 좋아합니다. 바라만 봐도 즉각 기분이 좋아집니다.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묘목도 한 그루 심어 주셨습니다. 나무가 저보다 빨리 자라 고가의 지붕을 넘어섰지요.
어릴 적 단독 주택에 살 때는 아침에 새소리에 잠이 깨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아파트에 살면서 그런 아침이 사라졌는데, 사라진 줄도 모르고 살다가 유학 시절 기숙사에 살면서 아침마다 수다스러운 새들을 다시 만나고서야 비로소 그 단절을 알아 차렸습니다.
2층 기숙사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비로운 떡갈나무Oak tree가 계셨거든요. 수령이 오래되면 가지가 땅으로 휘어져 굴곡져서 한 그루가 숲처럼 공간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 가지 하나에 올라가 책을 읽기도 하고 그냥 숨어 있기도 하고. 반지의 제왕의 그 숲이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던 국립공원에 현장 조사 나가던 시절도 그립습니다.
당시 무척 인상적이었던 나무껴안기, Tree Hugging 혹은 칩코Chipko 운동이 있었습니다. 인도 히말라야 칩코 지역 여성들이 벌목산업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나무를 껴안고 벌였던 조용한 저항운동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친구가 시애틀에 사는데 워싱턴주 사람들 별명이 Tree hugging hippie people이라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이고, 환경운동에 열심이고, 매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책과 무관한 얘기를 지나치게 한 셈인데, 나무이야기가 즐거워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나무에 관한 이 책도 반갑고 궁금하고 행복하게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직업과 연구 분야가 있다니! 뭔가 제 정보지식을 과신하다 다시 한 번 크게 놀란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첫 문단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멋진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이란 학문 분야를 아시나요? 나이테에 생장 연도를 부여하고 나이테에 저장된 다양한 환경 정보를 밝히는 학문(옮긴이)입니다.
Dendro는 ‘나무’라는 뜻이고, ‘Chronos’는 ‘시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입니다. ‘연륜’은 나이테라는 뜻입니다(옮긴이). 즉 나무의 나이테가 담고 있는 정보들을 찾아 읽어 내는 분야입니다. 기후나 토양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관련 이야기들은 무궁무진했습니다.
저자 역시 나이테가 과학의 한 분야가 될 정보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합니다. 잠시 상상해보니 나무와 함께 하는 연구란 참 좋을 것만 같습니다. 나무들은 정말 근사하니까요. 요즘은 특히 인간의 수명이 짧디 짧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몇 천 년 씩 살아가는 나무들이 부럽고 경이롭습니다.
“나는 연륜기후학자이다. 나이테를 이용해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고 기후가 생태계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다. (...) 매년 우리는 기후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태운 화석 연료가 기후에 초래한 대혼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 그러나 해를 거듭해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억제하거나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가 가져올 최악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196개국이 모여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야심 찬 노력을 기울이기로 약속한 2015년 파리 기후 협약 이후에도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
“연륜연대학은 생태학, 기후학, 인류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과 환경의 역사 사이의 상호 작용을 밝힐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연속적인 나이테 기록은 독일의 참나무-소나무 연대기로 지난 1만 2650년 동안 한 해도 건너뛰지 않았다.”
“세계적 규모의 네트워크 덕분에 과학자들은 나무가 자라던 지구 표면의 과거 기후는 물론이고, 지표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대기권의 과거 기후까지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연륜연대학이 정확하게 밝혀낸 한 해 한 해의 나이테는 인류와 기후의 역사 사이에서 일어난 복잡한 상호 작용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발판과 정박지가 된다.”
“물론 나를 사로잡은 나이테 이야기들도 들려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나무 착취와 산림 파괴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연륜연대학자들로 하여금 과거를 연구하게 만들고, 미래에도 지구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멈추지 않고 최고의 속도로 자신의 닿을 다음 천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지만 과학 진보에 대해 인류는 또한 불신과 무관심도 동시에 높습니다. 젊을(?) 적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혼란스럽고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예외가 아닌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오답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런데 같은 연도를 살지만 우리 모두는 또한 각자의 연도를 살고 있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예외도 잘못도 오답도 아닌 팩트였지요. 항상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저자처럼 과학적 발견을 재미있어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을 즐거워하는 - 저자는 짜릿함이라 했지만 - 그런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과학의 동력은 발견의 즐거움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궁무진하게 재미있습니다. 1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득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영상 자료로도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나무’라는 단일 대상에 관한 과학 분야이지만, 역사를 오르내리는 풍부한 문명적 사건들을 담고 있고 문장 자체가 아름다운 문학처럼 읽힙니다. 무려 지난 2,000년 동안의 지구 날씨와 인류 문명과 생태계의 변화를 저자가 나무와 함께 밝히고자 노력한 기록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폭우와 모로코의 가뭄, 나이테의 넓이와 해적선, 여름 추위가 닥친 것과 로마 제국의 멸망, 나이테에 기록된 어느 해의 화재, 가뭄, 추위와 같은 나무의 불만과 우울 증상들. 나무인데 사는 일은 사람 사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경쟁과 공격이 없고 식량과 물이 풍부할 때 나무도 행복하게 살고 자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기록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