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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평점 :
“전달할 사항이 하나 있다. 만약 당신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문 사람 축에 속한다면, 지금 이 여행 가이드를 손에서 내려놓기 전에 미래로 가는 짧은 시간 여행을 하며 최소한 맨 뒤에 실린 ‘후기’ 정도는 둘러보기를 바란다. 정말 놓치기 아까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 천문학자와 저널리스트인 두 저자의 공저이다. <타임머신>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계보를 이을 재미난 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첫 페이지부터 웃기 시작해서…… 계속 웃었다. 정말이다. 심지어 물리학 이야기를 하는 내용에서도 웃길 수 있는 대단한 저자들이다.
현대물리학의 혼란스러움와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어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시간여행을 안내하는 이런 책이 있다. 현재 현실의 나는 시간여행에 관한 거의 모든 진지한 가능성을 포기했지만 상상 속에서 만이라도 이만큼 흥미롭고 위험하고 설레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목차를 보니 도저히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빅뱅의 순간이나 공룡 시대는 무섭지만, 저자가 장담하는 대로 안전한 여행이 보장된다면 또 모를 일이다. 우주의 시작을 엄청 보고 싶기는 하니까. 모든 것의 시작점!
“다른 인간이 없고 어디에서도 음식을 사 먹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에 휴가 기간 동안 먹을 식량은 집에서 직접 가져와야 한다. 마실 물도 여기 에 해당 된다. 만일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여행용 비축 식량이 없어져 버린다면 돌아올 때까지 금식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도저히 굶을 수 없다면 되도록 잘 알려진 종을 잡아먹도록 하자. 낚시를 할 수 있다면 철갑상어처럼 보이는 어류를 잡아 보자. 아마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시간여행을 간다는 설정에 몰입하니 늘 하던 버릇대로 여타의 걱정거리들이 줄 지어 떠오른다. 각 시대별로 장소 별로 가장 완벽한 복장도 제공해 주려나. 그게 가능한 과학기술의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미래의 일들을 생각을 하는 여유로운 순간에는 무척 오래 살고도 싶다.
과거와 미래를 여행하는 법이 얌전히(?) 체험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고 하는 저자의 호탕함이 멋지다. 이야기 속에서 과학적이고 정밀한 한계에 신경 써봐야 소심해 지기만 한다. 된다고 하자! 영웅이 되어 보자!
그래도 젊은 화가였던 히틀러를 찾아가서 태연히 작품을 살 수는 없을 듯하다. 더구나 미소를 지으라니. 히틀러가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잃지 않고 계속해 나가는 삶은 바람직하나, 아직 행하지 않은 일로 누군가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가능하면 안 만나고 싶다. 다른 분이 해주시길! 최소 육백만 명, 그 이상의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나는 역시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자꾸만 현실의 과거와 미래에서 갈피를 못 잡고 상상들 사이를 오가며 읽는다. 간절히 바라는 종류의 세상을 만나 흥분한 탓일까. 어쨌든 책 속 시간 여행지를 보고 현실의 경험이 떠오르며 괜한 걱정이 더해진다.
예를 들면 오래 전 영국에 머물며 아프리카와 인도 지역을 가려니 미리 맞아야 할 백신 종류가 많았고, 돌아와서도 할 수 없는 제약들도 꽤 있었다. 백신 부작용으로 고생할 듯도 싶어 계획 자체를 취소 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에 비할 바가 아닌 시간여행은 더 준비가 철저해야 할 듯! 가령 페니실린도 없는 시대라면 파상풍으로 죽을 수도. 무섭다. 여행 전에 일단 예방 접종을!
그러고 보니 언어 문제는..... 시간여행이 기차여행처럼 안전하게 가능한 시대라면 그 쯤이야! 하고 믿어 본다.
‘시간 여행에 관한 아홉 가지 신화’의 내용은 일부 익숙하고 일부 헷갈리고 일부 재미있다.
(...)
2. 과거로 여행 가면 어려진다.
3. 과거로 가는 길은 단 하나, 우리가 지나온 바로 그 길 뿐.
4. 과거로 여행하면 텅 빈 공간에 내려앉는다. 지구의 위치가 지금과 다르기 때문이다.
5. 과거로 떠나면 현재 존재는 연기구름으로 변해 사라진다.
(...)
9. 시간 여행자들은 세상을 구할 의무가 있다.
물리학 이야기로 시작하는 내용이 신나서 시간여행에 대해 쭉 쓰고는 있지만 목차를 확인하시면 역사이야기를 더 좋아할 흥미로운 ‘종횡무진’한 방문기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장면들이 있지만 특히 매력적인 곳은 만국박람회장이었다. 1853~1854년 뉴욕이라면 겁보인 나라도 도전해볼 만하다. 드레스 코드만 소화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는 - 14세기 중반이라는 시대가 막막하진 하지만 - 살면서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없는 여행지인 그라나타 토후국이 있다. 무척 흥미롭게 들리는 문명이다. 모두 다 사라진 것만 같던 이성과 상식이 보존된 곳처럼도 보인다.
당시 유렵은 흑사병이 신의 형벌이라 여겼는데, 아니 믿었는데, 그라나타의 사람들은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 여겼고, 하수 시설도 갖춰져 있었으며, 여성들이 기독교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많은 권리를 누렸다.
중심과 주류에서 벗어나 보자 애는 쓰지만, 변방, 가장자리, 사라진 문명에 대한 여전한 무지를 절감하였다. 흥미로운 여행지일 뿐만 아니라 귀한 배움의 장소이기도 할 듯!
다시 우주여행으로 돌아와 보자면, 이런저런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일단 잊고 원하는 시공간으로의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하다면, 45~46억 년의 어느 한 때 우주에서 지구가 생겨나는 그 순간으로 가보고 싶다. 창백하지도 푸르지도 않을, 펑펑 터지고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로 존재하겠지만 - 알아볼 수 있을까 싶지만 - 그래도 지구의 탄생 순간을 보고 싶다.
성운의 한 지점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서로에게 끌린 입자들이 만나 연쇄적인 결합을 하며 지구라는 행성을 태양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곳에 만들어 가는 장면은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울까. 직접 본다고 해서 왜, 어째서란 지금의 질문들이 다 답을 찾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과학과 역사가 버무려진 내용인데, 역사는 과학사가 아니다. 이런 구성은 또 처음이다. 장르는 분명 SF이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이 하나의 범주로 구분되지 말라고 ‘종횡무진’한 작품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시대의 고정 관념들은 시간여행이 가능한 시대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작금의 주류와 현실에 경고를 가하는 지도 모른다.
과문해서 몰랐던 그라나다처럼, 세계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만들고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허용한 아이슬란드 여행을 열심히 권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여성 독자인 나로서는 여성의 권리와 자유로운 활동과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시대로의 여행은 전혀 내키지도 않고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는 사려 깊고도 재기발랄하게 경고를 잊지 않는다.
“여성이나 성소수자 시간 여행이라면 수녀나 고위층과 결혼한 여성으로 가장하는 게 그나마 활동하기 편리하고, 재산을 소유, 상속할 수 없고, 범죄에 연루됐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엄벌을 받을 수 있으며,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면 사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즐겁게 읽느라 분석력은 떨어지는 글이지만, 독일인 저자가 특별히 인용한 영국 역사학자 이언 모티머의 말로 미루어 두 가지는 짐작할 듯하다.
“아예 다른 방향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
“과거를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상상하는 즉시,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마지막으로, 무척 신비로운 책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