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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평점 :
SF, 추리, 스릴러, 올 해는 로맨스물까지 골고루 마구 읽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들을 마구 읽어도 좋은 책들이란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지만……. 어렵네요. 어쨌든 굳이 부연하자면 에디터와 마케터들이 정확히 대중 독자를 대상으로 출판한 대중문학작품이란 말씀을 마지막으로....... 이 중언부언을 마무리합니다.
숨만 차는 괜히 시작한 변명은 어렵지 않은 멋진 재미난 SF소설을 잘 읽었단 그런 말을 굳이 하려고……. 크흑, 이젠 좀 울고 싶네요. 뭔가 혼자 멍청한 소리를 계속하는 듯.
십 년도 더 전에 이미 읽으신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저는 소문만 듣고 다행히(?) 이번이 처음입니다. 시의적절한 묘사와 표현으로 수정되고 문장들도 다듬어졌다고 하니까요. 이후의 작품들을 먼저 읽고 좋아하게 된 작가의 첫 소설집을 읽는 기분이 또 색다릅니다. 특히 영국에서 출간되어 영어판도 함께 읽을 수 있어 아주아주 색다릅니다. 축하와 응원을 함께 힘껏 해봅니다!
인구 50만을 수용할 수 있는 674층의 초대형 빌딩이자, 도시이자 주권국가인 ‘빈스토크Beanstalk’가 배경입니다. 재크와 콩나무, 란 이상한 번역 제목*의 영국 민담이 떠오르시지요? 거기서 차용했습니다.
* 재크와 콩나무: 원제는 Jack and The Beanstalk. 재크와 콩줄기 혹은 콩대, 가 맞지 않을까요.
“대화하는 용도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 써요. 돈이나 소송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죠. 그게 매일 수만 통씩 빈스토크를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빈스토크는 바벨탑이 될 수 없겠죠. 언어가 갈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대담하게 동방박사, 아미타불, 이슬람 율법, 바벨탑이야기 등의 설정들이 비틀리고 변용되어 풍자로도 유머로도 등장합니다. 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권력장이란게 원해 그랬다. 중략. 그저 성의를 표하고 얼굴을 한 번 더 알렸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뜻밖의 좋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섬세하고도 오묘한 함수, 그 함수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정확한 계산보다 눈치와 타이밍이 더 중요했다.”
말랑하고 환상적이고 기발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고, 전쟁, 테러, 권력 투쟁, 부패, 관료제, 위계구조, 이민자와 난민, 대중정치의 공포 심리학, 도시의 자본화와 개인화 등, 현실 못지않은 중첩적인 문제들을 다룹니다. SF장르의 특성 상 더욱 또렷하게 강조되는 면도 있습니다.
“이번에 그 사업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수직 운송 업체들과 정치권 사이의 유착 관계 때문이었다. 유착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들이 드러나자, 원래 비판을 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 게 아니라 다른 규칙들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도서릴레이에서 발췌한 문장이 포함된 단락)
“일반인 중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에서 심각한 수준의 허위 정보를 흘린 적도 없었다.”
“그중에는, 이번에야말로 빈스토크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판을 막을 의인 열 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SF작품들이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들로 인해 현실을 부정하거나 포기하고 미래마저 절망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가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 사실 SF는 인류에게 가능한 가장 거대한 공동체, 지구공동체를 늘 염두에 두는 작품입니다. 염두에 두는 이유는 우리끼리 찢어져서 죽고 죽이는 거 그만하고 다 같이 잘 살아보자, 는 제안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낯선 환경을 배경으로 우리가 잘 아는, 못할 것도 없는 가치들로 희망의 제언을 들려줍니다. 협동, 연대, 용기, 사랑, 희생, 품위, 존엄, 믿음. 다 읽고 나니 처음 등장했던 이미지와는 무척 다른 타워가 눈앞에 있습니다.
씁쓸한 현실이야 금방 어디로 사라지지 않겠지만 갈라치기가 일상인 사회 환경에서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 함께 올바르게 살아보자, 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분위기가 저자가 쓴 문장들에 배어 있습니다.
“60년을 살면서 지켜봐왔지만, 바벨탑이 아니었거든. 우리끼리 서로 짜거나 한 건 아니었어. 물론 한두 사람은 나처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어. 중략. 예정대로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손으로 여기를 없앨 수가 있어야지 말이지. 여기 이 동네 말이야. 이 나라 전체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 동네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가상이지만 현실의 나에게 언제나 힘을 주는 어릴 적부터 늘 반가운 SF작품, <타워>는 기대 이상 풍성한 풍자적 상상력들이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어쩐지 즐겁지도 기분이 좋아지지도 안도감이 들지도 않는 무척 이상한 주말 밤과 새벽에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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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따로 첨부한 개념어 사전을 읽어 보면, 작품에 담은 작가의 개념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어렵지 않고 역시나 풍자적으로 재미있습니다.
먼지: 현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의 흔적. 초고층 문명의 사회계약은 누구든 털면 먼지가 나기 때문에 서로 탈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는 암묵적 합의 위에 이루어졌음. 그러나 이 사회계약이 법률상 책임까지 면제해 주지는 못함. 예)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