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와이너리 여행 - 식탁 위에서 즐기는 지구 한 바퀴
이민우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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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코너 앞에 서서 아무 와인도 못 고르고 헤매다가 그냥 나왔다대단한 와인을 사려던 것도 아닌데 눈 감고 아무거나 집어도 되는데무엇을 고민하는 지도 모른 채 고민하다 못 샀다집이 가까워질수록 이 무슨 신박하게 멍청한 짓인지 기가 막혔다간단한 판단도 불가능할 정도로 혈당이 떨어졌나……달달한 포르투 와인에 자꾸 눈이 가긴 하던데…… 정말 달짝지근을 싫어해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 거 안 단거 두 병을 사면 되었을 텐데……화가 나는데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건 비참할 정도로 무의미한 짓이라 결국 화도 못 냈다.

 

와인을 못 마시니 와인 책이라도 읽자면면이 놀라운 점들이 참 많은 작가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지만이민우 저자 역시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이력이 대단하다변화를 시작한 시기의 위태함도내내 집중을 유지한 와인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그렇고관련 분야에 뛰어들어 기어코 전문가가 된 짧지 않은 시간의 모든 노력 역시 그러하다도멘 바롱드 로칠드의 한국 담당이셨다니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이력에서 짐작해보면 저자의 첫사랑이자 진짜 사랑은 프랑스 와인일 것이다다른 와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프랑스 와인을 빼곤 와인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점 정도는 와인 공부가 아무리 싫은 나라도 알고 있다단지 너무 많은 정보와 이야기와 찬양에 지쳐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을 뿐.

 

160년 동안 명예와 지위를 지키고 있는 그랑 크뤼 와인최고의 와인을 맛보기 위한 13가지 사유인간의 수명보다 긴 프리미엄 와인을 만드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줄 서도 못 사는 로마네 콩티지나친 세계화와 상업화를 비꼬며 와인은 죽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도마스 가삭을 시작으로 14세기부터 교황의 와인을 만들어온 샤토뇌프--파프나폴레옹이 패한 후 외교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프랑스를 구한 샤토-오브리옹 등 프랑스 와인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야기들을 취할 듯한 유려한 표현들로 풀어 놓으시고,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한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그 이유는 지역에 따라 심을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중략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교육과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반면 관련 규정이 까다롭지 않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신대륙의 경우다양한 포도나무를 하나의 포도밭에서도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아비뇽 교황인 요한 12세는 지역 와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요한 12세는 샤토뇌프--파프 마을에 교황의 성을 짓도록 명령하였고 직접 포도밭도 조성하게 되는데바로 이때부터 샤토뇌프--파프의 와인이 교황의 와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샤토뇌프--파프는 와인의 황제 혹은 와인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 애호가들의 입맛을 지배한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휴가를 보내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도평생 한 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한 농부들을 많이 만났다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와인은 항상 훌륭했다농부들의 시간과 열정이 같이 블렌딩된 것처럼 말이다어떤 와인들은 와인 메이커의 성격을 닮기도 한다음악을 좋아하는 농부들은 종종 수확 철의 포도밭에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는데이들의 와인은 왠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 난다.“

 

나로서는 반갑고도 감사하게도 마지막으로 토착 품종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와인을 만들어내는 스페인칠레이탈리아 등 세계의 대표 와이너리 12곳을 소개해 주신다재배된 포도를 60~120일 건조시켜 와인을 만드는 이탈리아의 아마로네와 레치오토’ 이야기를 읽으며 무력한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현대 회화 작품처럼 쿨하고 시크한 오퍼스 원’ 이야기를 해주셔서 순간 연상 기억이 번쩍어딘가 킬리카눈 킬러맨즈 런 카버네 소비뇽Kilikanoon Killerman's Run Cabernet Sauvignon과 Riesling이 있(어야 한).

 

이 섬뜩한 제목 - killerman's run - 의 호주 와인은 로버트 파커가 21세기 최고의 레드와인이라고 격찬했는데도 불구하고 롯데칠성에서 4만 원대에 판매를 시작했고실제 구입가는 2만 원대였던 미스터리한 유통의 와인이다유사품인가 의심하며 구입한 친구가 명절 선물로 한 세트 하사한감사히 받았지만 민트 초콜릿 맛이 포함되었단 설명에 화들짝 놀라 치약은 삼키는 거 아니라 배워서 민트 차도 못 마심 너무 잘 보관했다 잊어버린 와인이다그나저나 이 이름은…… 호주의 사냥 전통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뜻이신지…… 궁금했는데 리즐링 옆면에 설명이.



 맛은…… 다음번 와인 코너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 말 이유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너무 익어버린 무화과 향이 나는 듯한 메독, 작은 새처럼 가벼운 메를로, 흙내가 올라오는 키안티, 이 중에 뭐든 고민 말고 몇 병 사서 쟁여 두련다.

 

무라카미 류는 그의 소설 와인 한 잔의 진실에서그가 마신 칠레 와인이 남미 무용수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와인은 병이 오픈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행한 파리의 골목을 상상하며 진열대의 프랑스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진지한 와인 메이커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그들은 와인의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을 한다.”


이 글을 이 책에 담아 주신 이민우 저자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오늘 나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어느새 이런저런 정체성이 생길 정도로 오래 많이 마셔 버릇했다.  21세기 최고의 레드 와인과 로버트 파커와 호주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그저 제 길들여진 입맛이 문제이며 온전히 취향의 문제라는 점을...... 모든 게 너무 새롭고 낯설어서, 저는 첫눈에 반하는 유형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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