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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평점 :
미스터리 스릴러라지만, 예상을 아예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 소설의 스케일은 일독으로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역사, SF, 판타지, 스릴러 장르 불문 안 읽어본 작품이 거의 없는데도 이동 구간들을 잘 기억하고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추리 소설로 명성이 자자하고, 오랜 세월 구축된 스토리들이 특기로 정형된 이인화 작가의 노련한 작품이다. 추리소설을 즐기기 위해 아주 날 선 지능과 지성이 필요하다면, 이 소설은 잘 작동하는 날 선 지능만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 정보와 지치지 않는 지적 호기심도 요구한다.*
* 등장인물들 중 부계 조상 한 분이 등장하시는데, 소설 장치라 창작된 것인지 의도가 있어 그런 것인지 남의 집안일이라 단순 실수인지, 어쨌든 집 안이 달리 나온다. 화가 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살짝 묘한 기분으로 읽었다.
이야기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 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일부 - 나를 위해서 - 정리해보았다. 그래봐야 전체 분량의 극히 일부이고 스포일러를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피한 내용일 뿐이지만.
우리의 희망과는 별개로 2061년 그 치사율이 흑사병 수준에 이른 바이러스는 코로나 61이란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 최악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측되는 존재의 이름은 아바돈이다. 한글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한국인을 지배하게 된 세상, 주인공 심재익은 한글을 수호하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지키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1443년, 1896년의 인물들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 2061년의 사람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얼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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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익은 의병들에게 성난 눈길을 돌렸다. “책! 책 어디 있나? 세종 장헌 대왕께서 지으신 어제 훈민정음 어디 있냔 말이다!”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중략. 재익은 마음이 너무 괴롭고 울적했다. 수 없이 탐사를 했지만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는 처음이었다. 인생의 물밑은 얼마나 깊은가. 몰락의 밑바닥이 감옥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태어나지 않은 부모미생전의 시간에 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밖은 어두웠다. 한때 한국인들의 것이었던 사라져버린 삶이 저 어둠 어딘가에 스며있었다. 그리고 재익은 홀로 남겨졌다. 추호도 용서 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과 함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느끼면 살기 때문인지, 다른 시간 여행처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장면들에 수정을 가하고 싶어 한다. 과거를 수정하는 순간, 바뀔 미래는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겪어 보지 못한 또 다른 미래일 터인데, 그 때의 판단은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인지, 나는 언제나 그 지점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이 소설만의 독특장 장치로서 현대과학과의 불필요한 논쟁조차 피하려는 영리한 의도인지, 시간이동의 방식은 육체를 이동시키지 않는 정신이동 방식이다.
홀로그램, 인공지능, 기계와 인간 사이의 혼종, 뇌에 전자칩을 이식해 몸을 인공지능에 임대한 인체 혼종 등의 다양한 SF 판타지 장치들로 등장한다. 새삼스럽지만 딱히 불가능한 기술 수준은 아니다 싶은 기분에 변화 속도가 참 숨 가쁘게 빨라졌구나 싶다. 그와는 별개로,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인문학적 성찰이 넘치는 문장들은 2021년 독자인 내가 충분히 따라 갈 수 있는 내용들이고 시사성과 현실성을 갖춘 통렬한 비판들이 적지 않은 분량 나오기 때문에 진지하게 읽고자 하는 독자라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법도 하다.
“탐사자들이 서로 적이 될 수는 있어. 하지만 우리 사이엔 어떤 규칙이 있다고. 우린 권력의 개가 아냐. 과학자들이지.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단 말야. 이번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걸 너와 내가 결정할 수 있어?”
시간여행은 상용기술인 듯, 기술사용에 따른 어려움이나 부작용은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성공적으로 1896년으로 이동하면 독자는 SF 판타지 픽션의 세계로부터 순식간에 친일파, 친러파, 독립운동가, 독립협회의 무대가 차려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실제 현실의 인물들이 카메오 출현을 하는 드라마 풍경처럼 픽션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듯한 사실성으로 전개된다. 게다가 책 중간 중간의 정성스런 삽화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료들처럼 느껴지는 지라 이 작품이 소설인지, 학문적 귄위가 있는 연구 자료인지 재밌는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작가가 얼마만한 공을 들여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모든 것에서 느껴진달까.
1896년에 발생한 아바돈의 치명적 옛것 - 치사율이 너무 높아 숙주를 너무 빨리 죽였던 바이러스 -의 이름은 데모닉이다. 바이러스가 일곱가지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하는 기술은 이도의 무지개라 명명된다. 구체적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에 취약한 독자로서 제물포에서 여러 세력들이 격돌하는 장면은 역사 판타지물 게임처럼 박진감있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이도(세종대왕) 우파, 좌파, 반이도파의 탐사자들로 나뉘는 각 세력들이이 원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원형 균주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판데믹도 종식시키고 인공지능관련 산업 패권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니 이 모든 소란이 다 납득이 간다.
초라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대단한 값어치가 있겠는가.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 누군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겠는가.
기계 혼종인, 인체 임대인, 철벅이, 유곽 창녀, 만인계 노름꾼, 세계공동어 운동가, 아편쟁이, 부두 하역 인부 그리고 시간여행탐사자들 등 흥미진진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가득하고, 판타지 픽션으로서의 새로움과 흥미진진함이 부족하지 않고, 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토대를 둔 역사 판타지로서의 이야기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 특히 1895년에서 1896년 구한말의 시기에, 조선왕조의 태조와 세종이 각각 여진족과 맺은 관계의 구체적 내용들이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으로서 설명되는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 이제는 명칭으로만 남은 청일전쟁 역시, 인천 제물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다시 생생하게 이야기로 경험하고 나니, 역사서를 읽는 기분으로 몰입이 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여진족을 팔천(八賤)이라 부르면서 백정, 무당, 노비, 광대 같이 대접했다. 서북 사람에겐 벼슬도 주지 않았다. 말로만 동족이었다. 여진은 조선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복속당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겪었다. 내가 문명이다, 더러운 반편들아. 게을러터진 무지랭이들아. 너희는 나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흉내 내어야 해. 그러면 나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비슷해질 수는 있을 거야 ……. 오만한 대동주의와 장형의식의 끝은 언제나 최악의 결별이었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이인화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 내는 기막힌 재능과 사회적으로 평가 받은 명성을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겠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통찰이 공존하는 점은 여전히 인상적이고 부럽기도 하다. 특히 감정의 과소비나 감정적 사치라는 표현을 문맥 없이 가끔 사용하는 나로서는 ‘문자학적 사치’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하고 반갑기도 했다. 가장 발달한, 모두가 꿈꾸는 알파벳인 한글을 문명의 주변국인 조선에서 만들고 한국인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사치라 하는 저자의 말을 읽으니, 사치와 낭비를 유쾌하게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들뜨고 사치스러워진다.
인간의 발음하는 분절음은 겨우 3천여 종인데 로마자는 그것조차 완전하게 표기하지 못했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자 각양각색의 발성 기관을 가진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기계들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흡착음, 당김음, 기식음, 떨림음, 공명음 앞에 로마자는 무용지물이었다. 중략. 그 불어내고 빨아들이고 쯧쯧거리고 쉣쉣거리고 뢱뢱거리고 왤왤거리고, 똙똙거리는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지구상에 단 하나, 이도 문자뿐이었다. 세종 이도(李?)가 1443년에 발명한 이 문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하여 398억 5677만 2340종의 분절음을 표기할 수 있었다.
벨은 이도 문자의 출발점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언어는 근원모음 아에서 시작되고 감탄사와 의성어로 이어진다. 전혀 다른 언어도 비슷한 감탄사와 의성어를 가지고 있다. 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소리. 위험을 알리는 소리. 서로 좋아해서 함께 있고 싶은 소리, 서로 닮고 싶어 하는 소리. 소리는 생명이 우주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
동의하시나요. 근원모음이 ‘아’라는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