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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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선생 본인이 화성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나도, 우리 회사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생 마음속에서는 실제 여행과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실하게 보증하죠. 이주일어치의 리콜입니다.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전부 들어가 있죠. 이걸 기억하세요.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드립니다. 아시겠어요?”



<토탈리콜> 1990년 작품을 본 이들이라면 SF적인 상상으로 꽤 오래 즐거웠을 수도 있다허나 2012년 확장 감독판으로 처음 감상한 이들은 대체현실이라는 뇌에 전달되는 신호를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더 현실감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부터 화성이 배경이든 사진이든 소재이든 등장하는 경험을 이어하게 되니 좀 재밌긴 하다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존경하는 필립 K. 단편들이 담긴 두껍고 묵직한 책을 펼쳐 아까워하며 조금 읽어 보았다.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가.

적어도 이성적으로 따져볼 때 그랬다.

하지만 이미 퀘일의 마음은…… 이성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비밀업무를 수행하는 비밀요원 퀘일국방과학연구소가 임수 수행 후 기억을 모조리 삭제했지만당사자는 막연하게 비슷한 가상 기억을 원하게 되어 주식회사를 찾아가 기억 주입을 위한 상담을 진행한다.

 

실제로 겪었던 일과 일치하는 가상 기억을 원했던 겁니다중략.

그래서 퀘일 씨는 그저 막연히 화성이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생각해온 거지요중략.

그들은 그것마저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욕구니까요.”

 

왜곡까지는 아니어도 점점 모호해지고 희미해지는 실제 기억보다 가상 기억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지요.”

 

새로운 기억 주입은 실패하고 그로 인해 기억은 뒤죽박죽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낸다비밀업무가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경찰은 살해를 계획하지만퀘일은 도망치고 그 여정에서외계인들과 실제로 조우한 경험도 기억해낸다.

 

무척 사랑스럽게도 외계인들은 퀘일과 친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친구가 살아 있는 동안 지구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그러니 퀘일이 죽으면?!

 

기억의 생생함은 정서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지그 기억의 정확성과는 관련이 적다는 충격적인 인지과학의 설명이 다시 떠오른다우리의 뇌는 어찌나 왜곡을 잘 하는지최종 목표인 판단을 완료하기 위해서라면 여기저기 끼워 맞추기도 자행한다


어쩌면 그런 뇌의 왜곡 체계에 대한 위로로 이 작품에서는 퀘일의 강력한 욕구사실을 진실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 욕구를 희망으로 등장시켰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현실에서 표출된 기억이 아니라 숨겨진 욕구를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오래 자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며 선택하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자신의 보존과 이익과 쾌락을 위해 뇌가 왜곡한 기억에 의존하면서도 내면의 진실한 욕구도 잊지 못한 채로.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취급을 당해 왔던특히 한국에서는 대단히 그러했던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에 대한 저 시큰둥한 반응을 기억해보면! - SF장르


스타트렉 무전기 디자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모토롤라의 검은 박쥐 휴대폰만을 사용했던 SF팬인 나로서는어릴 적부터 두근두근 설레며 읽던 필립 K. 딕 작가의 작품을 새로운 번역으로 새로운 표지로 새로운 출판사의 기획으로 거듭 만나는 일은 여전히 은밀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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