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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 소설가가 책상에서 하는 일
한은형 지음 / 이봄 / 2021년 2월
평점 :
별건 아니지만, 이 책의 독서법으로 목차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이 읽은 문학 작품 내용을 한차례 떠올리는 것도 좋고, 짧게 설명된 인물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유별나다’라거나 ‘까다롭다’라는 말을 들으며 아직껏 살아왔다는 스스로 ‘문제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라 칭하는 작가 한은형이 끌린 격정과 놀람으로 만나게 될 이들이다.
너무 많이 느끼는 안나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죽음을 사랑하기로 한 안나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불멸할 수밖에 없는 로테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결혼하고 싶지 않은 엠마 ― 제인 오스틴, 『엠마』
제멋대로 사랑하는 리디아 ―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도깨비불』
누구보다 세련된 엘렌 ―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배울 기회가 없었던 테스 ― 토머스 하디, 『더버빌가의 테스』
시대를 갖고 논 사라 ― 존 파울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
거짓 속에서 산 브리오니 ― 이언 매큐언, 『속죄』
돈으로 가득한 데이지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아몬드 냄새가 나는 페르미나 다사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끝내 지루함을 선택한 캐서린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순수와 격정을 오가는 요코 ― 미즈무라 미나에, 『본격소설』
열세 살에 권태를 느낀 에스메 ― J.D. 샐린저,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한 번에 담배 두 개비를 피우는 조던 베이커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세상 모두에게 잔혹한 나스따시야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백치』
죽을 때까지 왕녀인 마틸드 ― 스탕달, 『적과 흑』
서른에 사랑을 처음 배운 레날 부인 ― 스탕달, 『적과 흑』
‘격’ 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던 보바리 부인 ―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델핀 루 ―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미칠 수밖에 없었던 에스더 ― 실비아 플라스, 『벨 자』
남자 없는 여자, 에스텔러 ―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고아가 되기로 한 테레사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애벌레에게도 상냥한 앨리스 ― 루이스 케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검은 모자가 된 사비나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쇼샤 부인 ― 토마스 만, 『마의 산』
운명의 자매인 세 마녀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내가 꿈꾸는 사람, 바베트 ―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총 29명의 이들 + 작가 한은형이 한편이 되어 “우리가 뭐 어때서!”라고 일갈하면, 독자인 나는 숨을 멈추고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 없이 성공한 인생을 누린 인물들이 비범한 성격도 지니고 있더라, 는 불편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읽을수록 공감할수록 매력을 느낄수록 인생에 도움은커녕,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질 일만 남았다. 기존 질서도, 귄위도, 관습도, 때론 법과 도덕을 이유로도 자신다움을 누르거나 죽이거나, 하여튼 참지 않았던 이들이다. 그래도 저자는 태연히 우리를 일단 위로한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대신 재미가 있으니까.’라고.
물이 얼어 얼음이 되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기록하는 사람 - 회화 작품을 소개하듯 적힌 작가소개에, 목록에 있는 어떤 인물보다 작가가 궁금했다. 서늘하다던 온도는 작가의 글의 온도는 아닌 듯하다. 이 책의 문장들은 뜨겁다. 마치 클래식 음악에 작가가 새로 가사를 붙여 칸타타로 만들어 부르는 것처럼, 재해석과 변주가 화려하면서도 친근했다. 표지가 점점 더 세련되게 아름답게 디자인되어 재출간을 거듭해서 우리 곁에 거듭 돌아오는 세계고전문학이란 예술 작품처럼. 이렇게 모두 한 권에 담지 말고 한 인물에 한 권씩 29+1시리즈로 출간되었다면 얼마나 더 재미날까, 안타까웠다. 아까웠다.
★
『엠마』를 읽고 나서 제인 오스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평생 자기 방을 가진 적도 없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인 오스틴이 ‘다 가진 여자’ 엠마에 대해 질시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공평하고도 균형 잡힌 태도를 취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뻐근해졌던 것이다. 나는 이런 배포가 있는 ‘큰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런 그녀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을 적어본다. “1800년경 증오나 쓰라림,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항의하거나 설교하지 않으면서 글을 쓴 여성이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꽤나 사람을 좋아하는 부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거기에는 인물들이, 성격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어쩔 때는 체온과 체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저마다 다른 사람들, 성격들을 생각하면 깊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토끼 굴로 떨어지고 있는 앨리스가 된 듯한 마음이랄까.
남녀노소를 반하게 하는 안나라는 이 여자는 그런 완전무결한 인간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자부나 오만과는 무관한 데다 관대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 나는 이런 인물에 백전백패하고 만다. ‘진 느낌’이랄까.
에스더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했고, 아주 아주 끔찍하게 여기는 필수과목(물리학과 화학이었다) 마저도 혼자서 A학점을 따내곤 하는 예외적인 학생이었다. “물리학 수업을 받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모든 것을 글자와 숫자로 쪼그라들게 만든다는 점이었다”라고 느끼면서 그럴 수 있다는 데 나는 경이를 느꼈다.
1950년대라는 시대의 공기와 함께 그녀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1950년대 여자들에게는 요리와 속기와 춤이 필수로 요구되었다는 걸 『벨 자』를 읽어 알게 된 나는 에스더처럼 토할 것 같았다. 요리와 속기와 춤은 저마다 멋진 것인데, 이게 여자들에게 필수 덕목으로 요구되는 상황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남자를 돌보거나 보조하거나 기쁘게 하는 일들이 여자의 필수 덕목이었던 시대에 에스더 같은 여자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 잔뜩 모여 나를 위해 기다려주는 것처럼 들떠서 책을 헤매며 읽었다. 내가 달 코멘트라야 사족에 불과하지만 만난 시기도 공교로울 뿐더러 여전히 괴이하면서도 특별한 작품과 인물이 버티고 있다. 30 여 년이 지나 이 미친 연인을 다시 만났다.
천국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더라,
그냥 그 말이야. 나는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면서
정말로 서럽게 울었어.
천사들이 화가 나서 나를 집어던졌는데,
떨어진 자리가 폭풍의 언덕 히스 밭이었어.
나는 너무 행복해서 엉엉 울다 잠이 깼어.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언제 처음 읽으셨나요. 저는 10대에, 중2 겨울방학이었습니다. 조금만 부주의하게 넘기면 간혹 피부가 베이기도 하는 날선 종이 위에 세로로 빼곡하게 적힌, 어두운 양장으로 둘러싸인 묵직한 세계문학전집으로 만났습니다.
감정의 결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벅찬 노동처럼 완독을 했는데,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어두운 분위기와 불행 - 당시 내가 느끼기에 - 의 냄새와 호감을 가질 여지가 없는 캐릭터들과 배반당한 듯 억울한 기분이 들던 결론, 모두가 별로였습니다.
빨리 잊고 싶었는데도 어떤 이유로 사로잡혀서 폭풍이 그치지 않는 히스 밭에서, 히스클리프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편한(?) 기분을 한동안 현실에서 꿈에서도 느꼈습니다.
캐서린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소설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별로 없다. 어딘지 비현실적이고 어딘지 이상하고 어딘지 망가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게 두 남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누가 더 격정적인지 누가 더 망가질 수 있는지 죽을 만큼 힘겹게 다투는 연인이다. 캐서린이 지루한 천국을 택하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복수하는 데 쓴다. 캐서린은 죽고, 그들 주변 사람들의 인생은 모두 망가진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피를 토하는 게 저런 건가 싶다. “나는 내 히스클리프를 사랑할 거고, 저승까지라도 데리고 갈 거야. 그는 내 영혼 안에 있으니까.” 캐서린은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나서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죽는다. 자신의 열기로 자신을 죽였고, 그러므로 히스클리프도 ‘죽인다’.
역사도 도시도 아름답지만 불편한 점이 없지 않은 영국 요크에는 업무로만 가보았고, 해안가 히스 언덕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도심의 거리를 슬슬 걷다 왔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같은 성정의 인물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들었거든요.
폭풍우가 치는 워더링 하이츠에서 일렁이는 히스 밭은 캐서린이다. 히스클리프의 마음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뒤집어놓는 그 분홍 화염 말이다.
한은형 작가가 자신의 책 속에 펼쳐 놓은 히스밭을 돌아다녀보니, 10대의 나는 감상의 축이 어긋난 채로 읽었단 생각이 듭니다. 어긋난 그 공간, 어두운 틈에 온통 두렵고 불편한 상상들을 채워 기억했던가 싶습니다.
참 좋은 친구가 행복하고 다정하게 살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요크, 언제까지 저는 히스 밭이 놓인 그 언덕에 사시사철 폭풍과 어둠이 머무는 상상을 하고 있을까 막막합니다.
* 새로 배운 단어. 완악: 완악하다1 (惋愕하다) [동사] 깜짝 놀라다. 완악하다2 (頑惡하다) [형용사]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고 사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