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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 과격한 표현과 욕설이 포함된 글입니다.
‘아이들’ 관련 책들 중에는, 아이들을 잘 키워 보자는 권유와 열정이 가득한 책들, 혹은 당신의 아이가 정상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불안을 파고들어 마케팅을 하는 책들, 혹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최고의 교육법을 알려 주겠다는 제안서들이 다수일 듯하다. 그래서 작가의 직업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 하니 처음부터 흥미로웠던 책은 아니었다.
그러다 책의 일부를 접하고 마음이 움찔거렸고, 자주 그렇듯 좋아하는 지인들이 전하는 말에 완전히 홀려서 나도 읽자! 고 구입해 두었다. 그리고 뜻밖에 북클럽 2월의 도서로 결정되어 계획(?)보단 빨리 읽게 되었다.
총평(?)하자면, 어린이와 어린이들의 세계를 따스한 온기를 지닌 채 가만히 들여다본 책이라서, 기대를 완전 배반하는 시선이라 좋다. 감동적이고 잘 배우고 싶은 내용들이 엄청 많다.
1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들 중 깨달았도다! 수준의 충격과 더불어 기억하는 최초의 경험은 내 친구의 이야기이다. 출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가, 어느 밤 잠든 자신의 아이를 보다 통곡에 가까운 울음과 함께 눈물이 막 흘렀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어른들이 해줘야할 것들이 너무 많고, 그렇게 살뜰하게 다 살펴줘야 비로소 살아 성장하는 생명이 아이라는 생각에, 그렇다면 부모 없는, 혹은 다른 양육자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나 걱정되고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렇게 인식이 내 아이에서 다른 아이들에게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고 나니, 그 밤이 지나고 눈물은 멈추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는 모든 순간이 피부가 따가울 만큼 괴로워서, 전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찾아서 할 수 있는 후원을 하기로 했다 한다.
마치 동안거와 하안거를 마친 승려가 화두를 깨친 듯한 발표를 한 친구 덕분에 나는 하마터면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거나 ‘출산 시 불교에서 일컫는 자비의 차크라가 열린다’거나 하는 모든 과격한(?) 속설들을 다 믿을 뻔 했다.
이후에 그 친구는 두 명을 더 낳아 무려 세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날 ‘내 자식들’을 키우느라 모두 함께 살아갈 유일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너무 오래 접고 살았다고, 다시 한 번 인식과 삶의 영역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확장하는 결심을 발표해서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감동을 전했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자제하면 좋겠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있다.
나라의 앞날을 둘째 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2
인간이란 종은 언제부터 ‘어른’이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더 유의미한 건 '법적 성인'이라는 신분이라서, 솔직히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난생 처음으로 입장이 극도로 난처해져서 진땀을 흘리고 불안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큰 사고 소식을 듣고 놀라 궁금해서 TV를 켜자 화면 가득 배가 기울어져 잠겨 있던 장면, 붉은 글씨로 크게 입힌 전원구조라는 소식, 그리고 연락을 받은 학부모가 이제 안심이 된다고 하던 인터뷰, 나 역시 그 소식에 안도해서 전원을 끄고 커피를 내려 마시며 다른 일정을 시작했다.
그 거짓보도를 반증하는 이후의 끔찍한 과정이 이어지고, 마침내 분향소가 차려졌을 때, 나는 아이들이 내게 뭘 물어볼까 매일 더 두려웠다. 어째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제대로 설명해줄 말이 없었다. 차분하게 인터뷰를 하던 학부모가 어째서 오열을 토하는 유가족이 되어 떠도는 유류품을 움켜잡고 내 자식의 찢겨진 살점 같다고 통곡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길 위에 누워 버티는 곳을 찾아 빨갱이 새끼들 어묵되었다고 낄낄대며 아귀처럼 처먹던, 인간과 매우 닮은 저것들은 누구인지……. 눈도 못 돌리고 목격하는 현실의 장면마다 변변한 변명거리도 위로도 희망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온 가족이 의무처럼 8시 뉴스를 매일 말없이 시청하는 날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차를 돌리는데 8살 꼬맹이가 창 밖 심수미 기자를 알아보던 그 순간까지,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가장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형태로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기성세대로서 만들어온 세상에 대해 미래세대에게 책임을 추궁 받게 될 지도 모른단 피할 수 없는 자각과 함께, 대답을 해야 하는 어른이라는 입장에 대해 절감했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은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3
김소영 작가가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내 친구나 내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이야기들이다. 시선의 이동도 품고 있는 느낌도 다르다. 그래서 참 좋다. 새롭고 따뜻하다. 그런데 아주 깊고 무거운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이야기들조차 어떻게 모조리 재미있게 들려주나 싶어 자주 놀라며 읽다가 무심코 새어나온 제 웃음소리에 당황한 멍청한 순간들도 있었다.
어린이는 착하다.
착한 마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어른인 내가 할 일은 ‘착한 어린이’가 마음 놓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쁜 어른을 응징하는 착한 어른이 되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 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라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중략.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 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나는 평소에 어른들이 아이들 듣는데 ‘애 땜에 산다’, 그런 말은 그만 좀 하셨으면 하고 자주 바란다. 어쩌다 그런 말을 직간접으로 듣게 되면 그 말을 듣는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놀라 당황하게 된다. 살기 싫은데 나 땜에 억지로 산다, 는 생각을 하진 않을까. 그 부모가 계속 살기를 그만두면 또 어떤 힘든 생각을 하게 될까, 그만 마음이 몹시 복잡해진다. 이런 말을 무신경하게, 가끔은 재미있다는 듯이 하는 부모들…… 정말…… 너무……. 속상하다.
여러 온도로 쓰인 문장들을 읽어 나가며 김소영 작가가,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얼마나 애쓰는지, 어린이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세우고 싶은 체면이 얼마나 진지한 일인지,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누군가에 대해 이토록 우아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에 반했다. 참 멋지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엔 제 마음이 있어요.”
이 문장을 읽고 내 마음에 누가 손을 뻗어 간질이는 것처럼, 하여튼, 표현 못할 기분이 들었다. 부러워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선물을 받는 선생님 쪽보다는 이런 표현이 가능한 어린이를 더 부러워하는 스스로에게 당황하긴 했지만.
공감할 수 있는 문장들이 배부르게 많고, 너무 달라 불안한 부분들은 걱정될 만큼 저자의 여린 성품에 있다. 본인 생활은 그래도 최소한 챙기며 꾸려 가시는 건지 어딘가에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웃기지도 않은 오지랖처럼 불쑥 들기도 했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10 여 년도 더 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새 건물을 완공하고 입구 문을 만드는데, 세 명을 초청해서 이용하기 편한지 시험해 달라고 했다. 어린이와 노인과 장애인. 이 세 명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이라면 다른 누구라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l Design’*이란 개념을 모르던 내게는 무척이나 마음이 울컥하는 감동적인 일화였는데, 이런 디자인이 유니버셜하게(보편적으로) 보급된 사회에서는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 유니버셜 디자인: universal design. 아홉 살 때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려 이동하기 위해 휠체어를 이용한 미국의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Ronald L. Mace, 1942-1998)가 자신의 철학인 “모든 나이와 능력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ages and abilities)”를 나타내기 위해 용어를 만들었다. 오늘날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유니버셜_디자인
이 책에는 우리가 - 어쩌면 나만 - 만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마련되어 있다. 비가시적이지도 않고 타자화되지도 않은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세계, 양육자들이나 교육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처음부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들의 세계.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다.
곁에 있는 어린이들과 함께.
혹은 ‘내 아이’가 생길 때까지 몽땅 미뤄둔 관심과 애정을 가진 어른들도 함께.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고,
어느 순간까지는 아이 몫의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도 감수하는 것이 양육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까지가 양육이 아닐까 하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아마 그만큼 무겁지 않을까 그것 역시 짐작해본다.
유엔아동권리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