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뜻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 소설가가 식탁에서 하는 일
한은형 지음 / 이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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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들에게 음식이란 그저 육체의 에너지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이탈리아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매우 그러하다.

야채를 만질 때면 무뎌졌던 감각이 깨어나는 걸 느끼고,

음식의 이름과 역사와 기원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면 새로운 무엇인가와 만나게 되고,

처음 대하는 식재료를 통해 미지의 세계가 열리곤 했던 것이다.

 

샌드위치 고르기

 

함부르크에 처음 도착한 겨울 저녁마중 나온 친구가 이제 진짜 햄버거 먹어봐야지라고 기쁘게 제안을 했다...?! 햄버거에 대한 욕망이 별로 없이 사는 나로서는 똑같이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서함부르크와 진짜 햄버거를 알게 될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식당에 들어섰다짜잔...?! 이건 너무 적나라한 그야말로 빵 사이에 직화구이 고기덩어리 끼워 먹는 것아닌가요……고기반찬과 밥 먹는다 생각하면뭐 다른 듯 비슷……진짜든 아니든 기억에 남을 만한 맛은 아니었다.

 

역시 나는 샌드위치가 좋다내가 잘 만들 수 있고 만들 때마다 설렌다변주는 백만 개 이상 무궁무진하다아주 사치스럽게 만들 수도 있고가끔은 영국의 고집스런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빵버터오이 샌드위치도 먹고 싶어진다맛을 상상하면 이상한데 신기하게 맛있다어쨌든 단 맛 종류가 아니라면 다 좋다아이돌 샌드위치 맛보고 괴로웠습니다단순히 속재료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말고 빵 종류도 막 바꿀 수 있다그리고 샌드위치라고 만들고 마지막에 토스트처럼 구워서 먹는 반칙 형태도 있는데가끔 기대 이상의 맛을 볼 수도 있다.



계란밥의 세계

 

고슬고슬한 흰 밥에 버터를 한 조각 얹고계란 프라이를 올린 후 간장을 뿌린 게 버터 계란밥이었다간단하기 그지없는데 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중략내게 익숙한 계란밥은 따로 있다날달걀을 놓고 간장을 살짝 뿌려 불균질하게 비벼 먹는 밥이다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의 상태다갓 한 밥이어야 하고아주 밥이 잘 된 상태여야 한다중략계란 볶음밥을 할 때도 있다대파를 잔뜩 넣고 하는 계란파 볶음밥이다.

 

사실, ‘계란보다는 달걀을 좋아한다.

그래서 왜 계란밥이라고 하지 달걀밥이라고는 하지 않는 걸까라고 생각해왔다.

 

나도 달걀이라는 단어가 훨씬 좋다오래 전 닭이 낳은 알이 또르르또르르 구르다 동글동글한 달걀이 되었다고 상상하고 웃음이 막 났다그 후로 입 안에서 돌돌 구르는 듯한 발음의 달걀이 더 마음에 든다.

 

어릴 적 날달걀에 간장에 참기름에 김치줄기 반찬으로 밥을 자주 먹었다한참을 안 먹다가 20대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서 해먹어봤는데할머니가 담아 주시던 간장과 볶아서 짠 참기름이 없어서 어릴 적 알던 맛을 소환하진 못했다그 상처(?) 때문인지 이후론 아주 가끔 버터계란밥만 먹게 되었다.

 

그리고 볶음밥을 집에서 해먹는 분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나는 볶음밥은 요리사가 해준 것이 좋다화력과 수분과 기름의 양과 채소의 크기와 조리시간이 딱 맞아야 비로소 신음이 나올 듯원하는 고슬고슬 따끈따끈 볶음밥 맛이 난다그래도 남이 해준 건 비빔밥에 가깝더라도 감사히 잘 먹는다.



야생 아스파라거스 스토킹?

 

헌책빵을 어슬렁거리다가 야생 아스파라거스 스토킹이라는 책과 마주쳤다미국에 사는 한 남자가 야생에 돋아난 아스파라거스를 틈틈이 훔쳐보았다는뭐 그런 이야기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과 가격의 아스파라거스를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가끔 구워먹는데, '야생'이란 단어에서는 확실히 다른 향과 맛이 있을 듯하다왜 훔쳐보았는지…… 책 내용은 모르겠지만 제목은 정말 멋진 책이다보는 순간 홀려서 나도 집어 들게 될 듯하다한은형 작가의 글 덕분에 내게 아주 평범한 식재료인 아스파라거스가 단박에 흥미진진한 존재가 되었다필력이란 참 대단한 것이다.

 

스타벅스에 간다는 것

 

시애틀에 사는 친구가 그리울 때 떠오르는 장소이지만 실제로 가는 일은 아주 더운 여름날이다이유는 모르겠다커피에 얼음을 그렇게 채워 넣어도 여전히 커피 맛을 느낄 수 있게 맛있는 커피를 뽑아 주니까시음한 메뉴가 단 세 가지 카페 아메리카노 뜨겁게 차갑게 샷 추가 라 평가하기가 웃기지만 어쨌든 커피는 맛있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다는 것

 

취학 전 어릴 적부터 조부모님과 먹던 메뉴라 겨울에 먹는 냉면이 어색하지 않다커서는 사계절 내내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진한 육향이 감도는 냉면도 잘 먹었던지라 채식을 하면서 아쉽고 그리운 메뉴 1위에 오르기도 했다별 이상한 것이 입맛이라고 동치미는 엄청 좋아하는데동치미 냉면은 그저 그렇다길들여진 입맛이란 그렇게 고집스럽고 타협 불가할 때도 있다.



나의 길티 플레저

 

전 세계 200여 나라에서 하루 10억 잔이 팔려 나가는 코카콜라가끔 성분에서 농약 포함 인체 유해 성분이 검출되고 인도 지역 물 부족 주범이고 남미의 노조원을 살해한 사건에도 연루되어 있고 수익금의 일부를 무기 구매에 쓰는 기업들 중 하나이다그래서 하아…… 미치겠다 정말이런 마음이 들게 무척 속상할 정도로 자존심이 막 상하는데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꼭 마시고 싶다설명이 불가능하다심지어 어렸을 땐 쳐다도 안 봤다영롱한 빛깔의 환타*를 좋아했다속 편하게 콜라 한 잔에 얼마 이렇게 정해 놓고 관련 단체 후원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어쨌든 낯 뜨겁고 속상하고 확실한 쾌감을 주는 나의 완벽한 킬티 플레저이다.



환타나치 독일에서 탄생해서 소비된 Fantasie라는 독일어에서 나온 Fanta라는 이름은 그대로이지만, '환타'는 1960년 코카콜라 회사에 정식 인수되어 성분과 제조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만둣국은 왜 따뜻한가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내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한 가득이다.

 

첫인상이 좋았다내가 좋아하는 식당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집이었다중략어떤 안정되고청결하고오래 지속되어온 범절 있는 공기 같은 게 느껴졌다이런 집은 맛이 없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중략.

 

나는 지지 않아서손해 보지 않아서 잃었던 마음들에 대해 생각했다그리고 기꺼이 내게 져준그래서 아직까지 내 마음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달밤의 체조와 간짜장

 

내가 최초로 누군가를 따라해본 것은 간짜장 시키기였다짜장이 아닌 간짜장을 시키는 것중국집에서 주문을 할 때가족들이 짜장면과 짬뽕과 볶음밥 중에서 고를 때 짜장면이 아닌 간짜장을 선택하는 거다. ‘나는 간짜장이라고 말하면서 묘한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창피하지만 부인할 수 없다.

 

짜장과 짬뽕 중 고르는 일이 무척 괴로운 일이라 해서 혼자 깜짝 놀랐다나는 1:99 정도로 짜장을 고르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나의 최애는 유니짜장 재료를 갈아서 춘장과 볶은 이다재료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어도 좋다언젠가 친구가 이도 좋은데 유니짜장은 더 늙어서 먹고 씹는 맛이 있는 다른 메뉴를 먹어보라고 해서 유슬짜장 재료를 가늘고 길게 채 썰어서 볶는 -을 도전해봤는데 반전은 없었다.

 

그리고 소스만큼 면이 중요한데많은 분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탱글 쫄깃한 면은 싫다배달을 위한 면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간혹 첨가제가 밀가루와 동량이 아닌가 싶은 기분 나쁜 면들도 있다나는 삶겨 나온 뜨거운 면이 소스에 착 달라붙는 툭툭 끊어지는 부드러운 면이 더 좋다 - 수타면은 면제작자의 노고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원하지 않습니다첨가제 양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이라이스와 태교 음악

 

하이라이스를 끓인다정확히 말하면하야시라이스하이라이스의 근간이 될 예정인 하이라이스 소스를 끓인다중략카레를 만드는 과정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된다그러니까제대로 된 요리법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많은 걸 생략하고맛의 대부분을 고형 소스에 의존하는중략간편 요리다.

 

어릴 적 무척 멋진 어른처럼 보이던 친척 언니가 경양식집 같기도 하고 분식집 같기도 한 막 개업한 반짝반짝 식당에서 사준 메뉴가 하이라스였다그 날이 통째로 좋아서인지 정말 그 맛이 좋았는지오랫동안 그 식당에선 하이라스만 먹었다그런 내 애정과는 별개로 찾는 이들이 없었는지 어느새 메뉴에서 사라져서 정말 슬펐던 기억이 난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 보면 하이라이스를 좋아한다던 친구가 별로 없었다왜 그랬는지 만들어 먹을 생각은 못하고 간혹 레토르 상품을 데워먹기도 했는데일본에 머물며 맛본 하야시라이스는 내가 그리워하던 그 하이라이스가 아니라 무척 맛있는 새로운 메뉴였다. 2021년 처음으로 이런 저런 재료들 사다 천천히 보글보글 만들어볼까 싶다.



귤 냄새

 

귤을 가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좋다곧 공기 중으로 퍼질 산뜻한 냄새를 알고 있는내가 지금 좋은 일을 하려 한다는 긍지가 어린 표정을 말이다그래서일까귤이 잔뜩 실린 귤 트럭을 보면 지나치지 못한다귤의 색채와 심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거의 사버리고 말지만그렇지 못하더라도 귤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환타를 보고 첫 눈에 반한 것은 맛이 아니라 색이었다마시고 싶은 생각은 별로 안 들고 투명한 병에 담아 두고 주황색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았다눈부시고 황홀한 색그러니 귤도 무척 좋아한다나는 겉과 속의 색이 같은 과일들을 더 좋아하는 취향이기도 하고향도 맛도 모두 갖춘 과일이라 또 좋다작가가 색채와 심상에 저항하지 못하고라고 쓴 구절에 무척 기분이 좋아진다올 겨울에 배달된 귤 상자를 열었을 때도 정말 행복했다.



아직도 메뉴는 많이 남았다.

 

이렇게 추억의 메모를 모으는 것만 같은 글은 처음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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