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길 위에서 내일을 그리다 -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일상예술가의 드로잉 에세이 ㅣ 여행의 발견 1
장미정 지음 / 도트북 / 2020년 12월
평점 :
생각해 보면 세상을 바꾸는 일은 지나치게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아도 좋다. 중략.
작지만 선한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되는 멋진 일.
나로부터의 변화는 전 생애를 흔드는 힘이 될 수 있다.
안식년을 이토록 바쁘게 보내는 저자를 예전의 나는 아주 잘 이해한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37개 유럽 도시들을 오가며 그리고 기록한 이 책의 여러 장소들을 나 역시 쉬러 가서 뭔가를 계속하고 심지어 학위 과정을 들으며 휴가 중이라고 당당히(?) 밝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정표 앞에 선다고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큰 선택이 어려울 때는 작은 선택을 먼저 해 보면 된다.
가는 방향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다음 이정표까지의 방향만 정한다.
다음 멈출 곳까지 걸어가 다시 큰 숨 한번 몰아쉬면 된다.
환경학을 전공하고 강의하는 분이라 필연적으로 나의 동선들과 겹치는 곳들이 많다. 저자가 ‘친환경 도시’라고 칭하며 방문한 여러 곳들에서 나는 수많은 감정을 맛보며 사람들과 함께 깊이 살았다.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간혹 마음이 주욱 긁히는 느낌이 들 정도의 그리움에 묻혀 보고 읽었다. 1년 이상 살았던 곳, 몇 개월 일했던 곳, 몇 주 간 통역하러 갔던 곳, 몇 차례나 방문했던 곳, 그리운 참 좋은 친구들이 아직 머무는 곳, 심지어 이별을 했던 곳들이 계속 등장한다. 추억이 된 기억들은 어찌나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때론 현실보다 더 무섭다.
어느 물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울리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때로는 뜻밖의 곳에서 빛이 나기도 한다.
누구나 기대하는 그 자리가 아니어도,
조금은 어색하거나 낯설어도,
그 자리가 진짜 빛이 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다 내 불찰이긴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내 스케치북을 가져간 누군가, 스위스 바젤에서 2년치 다이어리를 가져간 누군가가, 언제든 기적처럼 그 기록들을 돌려주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거기에 이름과 과거의 주소와 과거의 연락처가 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예언자처럼 2018년 일 년을 온전히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신 기록이라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러운 마음으로 시샘하며 보고 읽었다. 더구나 이런 드로잉이라니! 누구나 일상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떠오르는 것과 그릴 수 있는 것의 차이가 너무 클 때는 자유나 행복을 느끼기 곤란하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경험으로서의 여행은 늘 감동을 준다.
그래서 또 다른 그리움으로 늘 여행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여행의 미덕은 미지를 향해 다가가는 것,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
‘할 수만 있다면’ 그리워할 것을 남겨가는 일이다.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들을 문장들에도 드로잉들에도 반복해서 아름답게 드러나있다. 자연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모습과 소유를 확장한 공유의 방식, 자발적 가난 혹은 그저 검소함, 오래된 것들을 무시하거나 치워버리지 않고 지켜나가고 변모시키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길 위를 걷는 여행에 대해 걷는 속도가 느껴지는 호흡으로 많은 장면들을 보여 준다. 가다, 멈추다, 서다, 쉬다, 가다. 그렇게.
저자의 시선에 담겨 옮겨진 모든 사소한 것들이 특별하고 소중하고 유일한 장면들이 된다. 아프도록 그립지만 슬프게 행복하기도 하다. 언젠가, 가 오늘이 될 날이 올지 안 올지 정말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찾고 싶은 일상들이 여기 가득하다.
개인적인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