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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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연작판화집 <변덕>(Los caprichos)에 실린 제43번 에칭

El sueño de la razón produce monstruos.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설명이 붙은 그림이 반갑다이 동판화는 프라도미술관이 소장한 고야의 작품으로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뜬다.”라는 제목으로 오래전부터 좋아한 작품이다. 18세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이고 유럽이 무대이긴 하지만시대와 장소를 차치하고도 메시지는 여전히 유의미하다책에 쓰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성과 결별한 상상은 터무니없는 괴물을 낳을 뿐이로되이성과 맺어진 상상은 예술의 어머니가 되어 온갖 경이를 창조하나니.”

 

계몽주의신계몽주의이성중심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의 사조 유행을 거치며 한 때 한국학회에서도 이성 비판이 유행을 거칠게 탔으나비이성과 반이성의 행위결과들에 언제나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 온 나로서는 이성과다로 인한 문제들을 다루는 일은 미래세계나 SF식 설정에 대한 비판처럼 느껴졌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장소신념사회국가언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더욱더 중요한 명예도덕판단력진실 등으로부터도 쉽사리 분리되었다저마다 자기 삶의 참된 이야기에서 떨어져나가 엉뚱한 가짜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날조하려 노력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우리한테 닥친 크나큰 시험인데우리가 만들어놓은 집단적 망상이우리 스스로 풀어놓은 초자연적 괴물이 우리 세계를우리의 사상문화지식규칙을 공격하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나는 온전히 이성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들을 만나 그들로 인해 힘들거나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합리적 이성은 적어도 내게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평가될 항목이다임마누엘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저술하고 발표한지 얼마인가소설 속에서만이 아니라 저자가 생명의 위협을 몸소 느끼며 겪었던 전쟁도여전히 현실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모습은 최고 수준의 반이성을 입증하는 자명한 증거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 속에 갇힌 수감자 신세모든 가족은 가족사의 포로모든 공동체는 또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고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역사의 피해자가 된다세계 곳곳에서 이야기끼리 맞붙어 전쟁을 벌이는데양립할 수 없는 둘 이상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을 차지하려고말하자면 같은 지면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때문이다.

 

현실의 종교는 어느 입장에 설 수 있을까무신론자로서 냉정하게 종교적인 내용들을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실 인정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안에 근본주의적인 유학자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계를 받은 불교 신자삼위일체설로 학위를 받은 기독교 신학자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다툼 없이 어울려 살았던 환경 탓도 있겠지만오래전부터 나는 종교인들의 가장 멋진 모습은 늘 행동에서 만나곤 했다.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이 계셔서 행복했고 자랑스러웠고 신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나는 그분들 모두를 존경하며 살았다김수환 추기경님 말씀은 책의 어디를 넘겨봐도 언제나 여전히 명징하게 울리고법정 스님이 비구 법정이란 이름 하나 자신의 몸 위에 올리고 불타올라 온 생명들과 섞이실 때는 어느 사회 개혁가의 삶보다 깊은 감동을 받았고올 해도 새해 첫 날엔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읽었다.

 

반가운 출간 소식으로 다시 오신 이해인 수녀님이 일부 신자들이나 친지들은 수녀들이 다 좌파라고도 해요좌파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약자 편이라고 제가 정정해주죠.”라고 속 시원하게 전해 준 이 말이꽃노래보다 더 지겹고 실체도 없는 세간의 이파저파 타령에 얼마나 통쾌한 울림을 주던지.

 

어쨌든 종교의 이런 저런 모습들이 공존하지만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내용들 중 하나는 현실에서 종교로 인해 생사의 위협을 겪어낸 저자가 펼쳐내는 두 철학자 - 12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와 가잘리스 의 종교 논쟁이다이해인 수녀님의 일갈처럼 이 논쟁 역시 다 읽으면 속이 시원하다.

 

매번 쓰는 글마다 줄거리 전달력이 거의 없다고 해도 이 방대하고 떠들썩한 책의 내용을 조금은 언급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이 책의 제목 2년 8개월 28일 천일 하고 하룻밤 더 은 귀양을 사는 이븐루시드에게 찾아온 마족의 공부에게 철학자로서의 들려 준 수많은 이야기로 보낸 시간이다공주의 이름은 두니아세계라는 뜻이다.

 

내 몸에서 세계가 태어날 테니까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들이 세계로 퍼져나갈 테니까.

 

또한 2년 8개월 28일은, 800여 년이 지난 20세기폭풍우가 몰아치고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비이성이 난무하는 재앙의 시간이기도 하다.

 

두려워하라내가 삼라만상을 불사르며 심판하리라.

 

진정한 사랑도인류애도복수심도또 다른 전투도영혼의 구원도운명과 본성도 저자가 세상 모두를 뒤져 모조리 가져온 캐릭터들과 모티브들을 다 이해할 수도 은근슬쩍 버무려놓은 다른 소설들 역시 모두 분간해내기 어려울 만큼 풍성하다.

 

처음 듣고는 이런 장르는 명칭 자체가 이율배반 아닌가 싶었던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신화에 버금가게 비현실적이고 엉뚱하고 재밌고 풍자가 가득한 창작물이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반영하는 문장들이 보인다전투와 전쟁과 욕망과 혼란의 모습들은 모두가 권력 관계로 묘사된다약소국과 여성을 유린하는 기득권의 모습가난하고 국력이 약한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금융 국가의 모습들.

 

어떤 공동체든 그곳이 어떤 곳인지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한마디로 어떤 상황인지 합의조차 할 수 없다면 이미 위기에 빠진 공동체입니다.

 

나는 이 지구가 결국 온 인류를 거부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실험 대상에 불과할까?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자를 변모시키는구나.

 

광기와 분노에 휘둘리고복수와 두려움으로 자멸하고자신들이 만든 가짜 신을 위한 헛된 전쟁으로 삶을 허비하고 이 모든 혼란의 끝에 인간은 다시 평화를 찾는다물론 그 평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진혹은 숨긴 어두운 기억들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것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주체인 자신을 직시해보라고 저자는 말을 건넨다그리고 참 반가운 말잠든 이성이 깨어난 이성의 시대가 파괴와 죽음 대신 생명과 생성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 희망한다


가장 중요한 정보 전달자이자 이야기 공유 기능을 하는 언론이 가장 먼저 이성의 시대를 맞이해주면 한결 희망적이리라 생각하지만……신뢰도가 무한바닥인 언론 환경에 사는 처지라 의지처가 마땅하지 않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그들의 회복력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다시 고야의 동판화의 메시지를 생각해본다판화에서 잠든 인간을 깨워 펜을 쥐어주며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부엉이의 역할처럼이야기가 현실을 비춰주는 참다운 거울이 되었다고 이븐루시드는 생각했다이 우아하고 유려한 혼란이 가득한 소설에서 저자는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인간들을 사적 관계만이 아니라 관찰 대상으로 비춰보고 이야기로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장도 인류의 입장도 이해해보려 했을 듯싶단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비로소 이해하는 참으로 이상한 종족인 인류가 만난 재능 많은 이야기꾼들 중 한 명인 헤밍웨이는 용기란 핍박 속에서도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가짐이라고 했다저자 살만루슈디Salman Rushdie는 그렇게 살았다그 와중에 위트와 농담도 잃지 않은 걸 보아 참 위대한 인간이자 작가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일이고상상 속에서마저 나는 핍박의 낌새만 확실해져도 품위를 저버리고 목숨을 구걸할 듯싶어 참담하지만기준을 높이 두고 선망하고 바라보고 발돋움을 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한다아직은 거부감 없이 저 아래로 추락하여 수치심 없이 하질의 인간이라 그만 인정하고 마냥 편하게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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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5년 미카엘 축제기간에 출간된 이 저작은 현실 정치를 가능케 하는 원리를 논구하는 철학적 기획이다자유로운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도덕적 인격이기 때문에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가질 수 없고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즉 이 국가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입각한 국제연맹을 결성하며 모든 국가들의 역사적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면서 세계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철학자 칸트의 이 세계평화론은 후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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