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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ㅣ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우리의 감정과 소망의 방향은 흔히 타인과 그들의 행동을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영향력 가운데
우리의 자기 결정을 방해하는 것과 도움이 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질문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 글이라서인지, 읽으며 필사를 하다 보니 심리상담 세션을 마친 기분이 들었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 형식과 철학자가 단정하고 말끔하게 입말로 전해 주는 문장들 덕분이다.
과감히 플라톤적 대화의 방법적 기본 사상을 표현해본다면, 문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장이 전부 어떠한 사상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내가 정한 주제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저 질문을 오래 고심해본 적이 없는 이는 또 누가 있을 것인가. 임시방편의 대답들에는 계속 도달했을지라도 결국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도’, ‘잘 하는 일을 하며 살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일상이 다른 모든 가능성들의 앞을 막아선다. 그러나 이 결론은 내가 한 선택들의 총합이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전횡과 편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자기’결정에 대한 글을 읽으며 ‘타인의’ 글을 충실히 필사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니, 내 ‘자신의’ 덧붙일 만한 의견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적 구조 변경은 뚝딱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는 저자의 말을 의지 삼아, 기억하고 익히고 경계하고 내 것들로 만들고 싶은 문장들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싸움을 포기하고 화해를 청했다.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 모든 것은 내적 단조로움과의 싸움, 체험과 바람이 변화 없이 굳어버리는 현상과의 투쟁입니다. 중략.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조종하는, 나의 느낌들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는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코로나 확산의 반복을 지켜보며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차갑게 식어가는 공감과 연대를 감정을 느낀다. 울화가 더욱 파괴적인 혐오의 에너지로 전환되기 전에 나는 나름의 이해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시의적절한 것이 사적 필요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인지, 이 책을 추천한 작가의 빛나는 통찰력의 은혜가 내게도 골고루 닿았다, 는 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최면,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생각의 형성도 못하게 만드는 세뇌작업 등입니다. 조종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합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이건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중략. 다른 이가 먼저 살아가고 먼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이 가르치는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공동체를 만들어 현재의 문명까지 이어온 인간의 사회성이 낳은 상호 의존성에 어떤 의문도 반감도 없지만, 그 안에서 여러 이유로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보다 타인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게 살았던, 살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 뭐 별나게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은 실제로 무의미하기도 하다. 허나 의존성이 두려움으로 소속감이 신봉으로 상호작용을 넘어 과한 충성으로 이어지는 행동은 개인에게는 지속 불가능한 무리한 방식일 것이고, 집단을 이루면 소속된 집단이 소속된 사회 전체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해가 적을수록 잔인함에 치우칠 위험은 높아집니다. 우리의 시기와 미움, 드러나지 않는 질투심, 비록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숨겨져 있는 증오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잔인한 폭력이 많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가짜뉴스가 적어도 지구상의 어떤 바이러스보다 확산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목격한 이후, 판단을 위한 정보와 지식을 찾는 일이 훨씬 더 힘겹다. 통계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 세계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찾아낸 수치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디까지 확인해 봐야하는 것일까. 물론 수치가 바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고 그 사실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이해하고 거듭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삶이라면 어찌나 고단한지 하루 종일 목이 뻣뻣한 기분이다.
타인이 휘두르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눈과 귀를 틀어막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본능이 앞서는 줄 알면서도 오류를 범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편견에서 출발해본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경우도 있다. 자기 포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철학자가 가장 선명하고 친절한 표현으로 열심히 전해 준 <자기결정>을 첫 입부터 꼭꼭 씹어 다 소화시키고 싶어서 꾹꾹 눌러 쓰며 읽었다. 맞춤한 분량이라 참 행복했다. 2021년 1월이 분주하게 거의 다 지나간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경쟁과 순위의 논리가 너무도 시끄럽게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많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