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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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들은 나 혼자서 쓴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모든 것들과 글의 세계가 써준 것이다.

나의 삶 또한 모든 삶들이 나를 살아주는 것이다.

 

..성명의 뜻은 정확히 모르지만 이름과 사진과 삶과 시가 이토록 많이 닮아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아프고 날카로운 말이라곤 하나도 없을 듯해 목덜미의 묵직함이 사는 일의 무게처럼 느껴지는 지친 날에는 그의 말과 글과 삶이 담긴 책을 열어 구경하고 싶어진다반가운 신간 소식을 들은 지 여러 날책이 도착하니 강화도의 바람도 바다향도 땅 냄새도 같이 온 듯 반갑다.

 

함시인이자 작가가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자본주의에 잘 적응한 스타작가로 성공을 위한 팁을 들려주며 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다 못해 웃음이 절로 터지는 상상이다그렇다고 작가가 문명 비판을 말이나 글로 열렬히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큰 목소리 대신 작가는 낡은 것들을 가까이하고 산다고자연과 친밀하게 산다고 자신의 일상을 그저 보여준다문장에도 쓰인 속도가 있다면 작가가 느릿하게 살아가는 그 속도와 나란히 태어났을 듯한 그런 단출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줄에 세상을 담는다.

 

세상에서 제일 큰 마을은 스마트폰 속에 있다.

이 마을의 길은 전파다.

이 마을에는 집과 방을 만들 수 있는 영토가 무량하다.

이 마을은버튼 하나로 전출입이 자유롭다.

이 마을에는 없는 게 없지만 자체 무게가 없어 휴대하고 다닐 수가 있다.

이 마을에는 범죄 신고 센터가 있고 우체국도 있다.

이 마을에는 담장도 있고 우물도 있다.

주문하면 이 마을에서 물이 배달되어 온다.

이 마을을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소유할 수도 있으나 완벽하게 소유되지는 않는다.

이 마을은 전파 공동체다.

 

시가 아니라서 살짝 서운한 마음은 아마도 내 테이블까지 잘 조리된 식사를 가져다주길 바라는 유형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시인의 에세이 글은 내게 낚싯대를 건네고 물가에 가서 직접 낚아보라고 펼쳐 놓은 체험장처럼 다가온다<눈물은 왜 짠가>를 낯설고 불편하게 읽으며 알게 된 시인이고<긍정적인 밥>을 읽으며 내가 하는 일을 가늠해보았던 작가의 에세이라그때보단 덜 서러운지눈물은 덜 짠지밥은 늘 따뜻한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표지를 투닥거렸다.

 

풀을 베다가 쉬면서 맡는 풀 냄새는 정말 향기로운 것일까.

몸 잘린 풀의 냄새가 향기롭다니.

새소리가 정말 아름답게 들리는 것일까.

새소리에 나비가 놀라고,

놀란 나비가 다가오던 방향을 바꿔 실망한 꽃 빛깔이 순간 옅어졌을 텐데.

내 감각에,

잔인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폭력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썩어 내가 못 먹게 된 음식에서만 악취를 맡는 내 후각도 감각에 내재된 폭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

내재된 폭력성을 이마에 버젓이 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는 폭력 냄새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되새겨보지 않고 묵인한 결과일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는 폭력이 가장 활기를 치는 시절이 현재가 아닌가 한다. 그런 부류 중 최고라는 댓글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서로 죽여라, 죽이자, 라는 고함이 들리는 글이 대부분이라고 하니 글로 만든 지옥도가 따로 없겠다 싶다. 실제 그런 댓글들로 생을 중단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 시대의 언어에 얼마나 많은 폭력성이 내재되었는지 분석하기가 처참할 것 같다. 물론 언어 말고 행동으로 과격하게 표현되는 과장된 폭력성도 꽤 있다. 일례로 사람들이 죽인 뱀이 뱀이 죽인 사람들보다 비교가 안 되게 많음에도눈에 띄기만 해도 뱀을 혐오하고 사생결단을 보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심지어(?) 함민복 시인도 그런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뱀은 내가 수없이 제 집 위를 밟고 지나도 나를 물지 않았었는데 나는 뱀을 보자마자 공격했으니……올여름 내가 죽인 뱀이 내게 시 한 편 써주었습니다.

 

나는 본가 조모께서 집지킴이 구렁이가 창고 쌀가마니 위에 살고 있는 것을 묵인하실 뿐 아니라 놀래어 집을 떠나지 않도록 조용히 필요한 것들을 꺼내 오는 장면들을 어릴 적부터 본 지라그리고 살면서 뱀에 해를 당해본 적이 없는지라, 두려움이나 혐오와 같은 강렬한 감정이 없다.

 

오히려 산책이나 등산길에 옆으로 스르륵 기어가는 뱀을 만나도 다람쥐나 딱따구리를 본 것처럼 역시 반가웠다무척이나 아름다운 무늬에 부드러운 몸짓등산용품을 구비하고 영양 보충을 하면서도 연신 터덜 터벅거리는 나에 비하면 얼마나 우아한 생명인지.

 

언젠가 잠깐만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라고 장난처럼 말을 했더니지나가던 뱀이 가만히 멈춰 선 적이 있다의사소통이 이루어진 거라 멋대로 생각한 나는 신이 나서 좋아하며 가까이 가서 정말 아름답게 생겼다하며 사진을 찍었고동행한 친구는 누구를 더 원망해야 할 상황인지 몹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돌발 상황을 나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허나 영암에 사는 그 아름다운 뱀은 쿨하게 사진 모델을 해주고 내 감사 인사까지 챙기고 유유히 풀숲으로 가던 길을 이어갔다.

 

소스라치다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바위나무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말랑말랑한 힘함민복문학세계사, 2005

 

지름길을 벌고 살아가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밤길.

살면서 더러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만나 길의 냄새길의 소리길의 침묵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자꾸만 과거의 장면들을특히 신나게 즐겁게 이곳저곳 다녔던 추억을 꺼내보는 일조차 위험한 시기이다남들 여행기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가시지 않는 답답함에 잠깐 나가볼까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솟는다막 희망의 단초가 보이기 시작한 때에병리적인 사명이라도 완수하려는 양 자꾸만 확산을 부추기는 몰상식한 집단의 소식을 자세히 전해 들은 날이라 더욱 갑갑하다.

 

내 자식만 잘 되면 장땡이라는 교육열이란 다소 고상한 표현을 가진 욕망과근본주의적 종교관으로 우리 편 아니면 사탄과 악마라 악을 쓰는 열기와판데믹 시절의 틈새에 수익창출을 노린 탐욕스러운 안목이 비릿하게 결합한 결과로서의 재확산언제까지 되풀이할 건지언제까지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 조심스러워만 할 건지언제까지 시민사회와 정부가 사후 대책과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지 울화가 치민다.

 

따스한 이상 기후가 잠시 물러나고 태풍과도 같은 눈보라와 한파가 다시 온다고 하니그전에 해야 할 일은 넉넉한 식료품 사재기만은 아니라는 분한 마음에 오늘은 꼭 바람과 파도와 눈과 밥과 나무와 통증과 희망이 담긴 이 책을 다 읽는 호사를 누리겠단 오기가 들었다.

 

모든 농지는 수평지향적이다.

논이 그렇고 밭이 그렇다.

농부들은 보다 많은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끝없이 경사진 땅을 까 내려 평평한 땅을 넓혀 왔다.

또한 어촌의 생활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바다 그 자체가 수평 아닌가.

파도가 높이 일어 수평이 깨지면 어부들은 일할 수조차 없다.


한참을 읽다가 부제가 다시 생각난다.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시인이 꾹꾹 눌러 쓰고 담은 편지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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