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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다니엘 튜더 지음, 김재성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방인의 시선에 머문 현지인, 즉 한국인의 외로움에 대해 썼다고 하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안 나서일 가능성이 더 많긴 하지만 처음 만난 종류의 변별력이 있는 용감한 책이란 생각에 기대가 컸다. 한국 사회가 백인 남성에게 가장 우호적이고 너그럽긴 하지만, 모욕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표현한 호의에 정확히 비례하는 혹은 몇 곱절의 반감과 배척도 가능한 사회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여전히 가끔은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나의 생존과 타인의 생존이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최고조로 인접되어 있는 시절이다. 아무리 물리적 거리두기일 뿐 심리적으로 우린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마치 아주 재미있고 그리운 꿈을 꾼 아침처럼, 현실에 머물러 주지 않는 위안이다. 책과 저자를 경애하는 나에게 모든 책들은 거의 실패 없이 위로고 격려이고 지지대이지만, 읽고 나면 갑갑한 테두리가 쭈욱 늘어난 기분이 들 이 책과 저자가 유독 반갑다.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반화의 오류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수년 간 함께 지낸 경험으로 진지한 영국인의 분위기를 모르는 바도 아니기에 별 기대가 없다가, 작가 소개에서 크게 웃었다.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범생이와 사차원의 중간 어디쯤은 어디인가요. 게다가 내가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첫 출간이 아니라 이전 출간작들의 제목이 한국 사회에 대한 깊숙한 경험과 고단한 숙고를 느끼게 한다.
“야근, 회식 없으며 점심시간 자유로움.” 올해 초 우리 회사 채용 공고에 실었던 문구다. 중략. ‘여러분은 각자의 삶을 원하는데 여전히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회사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 일해요.’ 이게 메시지의 골자다.
점심시간의 의례 가운데 특히 질색이었던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쉼 없이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는 “아, 네…… 아이, 그럼요” 하며 맞장구를 치는 거였다. 그것만 피할 수 있다면 감봉도 감수할 것 같았다.
부서 술자리도 잦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이따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주말 등산이었다. 중략. 서구 개인주의 감수성이 꿈틀꿈틀 올라오면서 분노가 솟구쳤다. 왜 내 인생을 소유하려고 하지? 일만 해주면 되는 거 아냐?
돈은 정확히 계산해줄 테니 미친 듯 일해 달라, 는 첫 회사를 과로사로 죽기 싫어 탈출한 후, 긴장이 풀린 탓에 속 편하게 아는 바도 없이 9-6으로 반복되는, 그야말로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공사 채용에 덜렁 지원서를 넣었다. 취업대란에 시달리는 이들의 분노를 살지도 모를 일이나 어쨌든 당시에 간단명료한 이력서와 지원 동기를 보내자 이메일로 면접 일시가 도착했다. 글로벌 외국기업과 글로벌 한국 대기업이 치고받는 사이에서도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경험이 키운 무모함과, 연봉에 육박하는 시간 외 수당 덕에 당장의 생활비 걱정이 없어서였는지 청바지에 배낭 메고 오~ 신기해, 구경 나온 듯 찾아가서 어딘가의 한 쪽 파티션에서 부장, 과장 그리고 대리 두 명을 만나 한담을 나누다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발령 난 곳이 한 사무실에 200여 명이 근무하는 설계팀이었다. 그때야 뭔가, 어, 너, 이런 조직 생활할 수 있는 거였어……. 라는 ‘현타’가 왔지만 이미 늦었다. 생양아치가 될 작정이 아니라면 첫 출근 날 사의를 표명할 순 없는 일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타인과의 피부 접촉을 싫어해서 악수는 안 합니다, 채식인이라 고깃집 회식은 안 가겠습니다,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서 여름 등산 야유회 참가 의사 없습니다, 점심은 시끄럽고 후텁지근한 직원 식당 말고 알아서 도시락 먹으면 안 될까요, 식사 후 함께 하는 내기 당구 싫습니다, 술잔을 높이 들며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일은 바보스러워 안 하겠습니다.. 우리가 남이 아니면 뭡니까, 국회의원 감사일에는 왜 TV를 틀어 놓고 업무를 해야 합니까, 부장 퇴근 전까지만 일하는 척하는 야근은 하지 않겠습니다, 2팀 부장님은 왜 근무시간에 영어학원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이사님의 주된 업무는 한 달에 한 번 나타나 소리 지르는 일이 다입니까 등등 등등.
출퇴근 통근버스가 집 앞으로 와서 태워주고 일은 널널하고 복지 혜택은 완벽하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직원 모두가 야근을 한 것으로 조작해서 월급을 늘려 주고 - 네, 다 세금입니다, 친해졌다고 판단되는 직원들은 어지간한 실수에도 미래와 인생 전반을 걱정해주며 퇴사시키는 법이 없는 인정 많은 직장이지만, 첫 번째 3개월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는 퇴사할 기회를 찾고 싶었다. 매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없는 기회라고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격해졌다.
하늘이 도와 다행히(?) 인도네시아 장기 출장 일정이 잡힌다는 소식에 나는 당분간 한국을 떠날 수 없는 개인사가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순 뻥을 치며 눈물의 이별식을 무사히 치렀다. 지금 생각해도 그 공개적인 거짓말에 심장이 화끈거린다. 스스로에게 불리한 것을 잘 잊는 기억력을 신뢰하기란 힘들지만, 그건 내 생애 최초의 치밀하고 의도적인 거짓말이었다. 뭐 한편으론 탈출 계획이라 명명하고 싶지만.
그러니 직장은 달라도 저자가 겪은 예시가 어떤 장면인지 어떤 기분인지 마치 전투 동료를 만난 듯 이해가 잘 된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모든 공동체와 공동체적 가치가 아니다. 아는 바가 별로 없긴 하지만, 인류가 협동의 결과물로 지금의 문명을 이룩했다(그 문명 전체가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지만)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과 정신적 가치라는 건 유구한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고 여전히 그렇고 미래에는 공감과 연대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 중 얼마 동안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이 무시되는 건 절대 안 될뿐더러, 나로서는 그런 식으로는 업무는 고사하고 존재를 지속할 수가 없다. 내가 만약 부양할 가족이 있는 형편이라 떠나고 싶은 마음이 폐부를 찔러도 버텨야 했다면 그 부작용이 어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내부로 혹은 외부로! 사회인으로 처음 겪은 한국 사회 거대 조직에서의 경험과 버티고 견디는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이후로도 오래, 실은 지금도 내 처지에 대한 불평의 대부분을 사그라지게 한다.
개인으로 존재하고픈 욕망의 핵심은 단지 집단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위계적인 문화와 무례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다. 회사생활뿐만이 아니다. 집, 학교,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질문을 받지 않을 자유, 청하지 않은 조언을 듣지 않을 자유, 진로 결정과 옷 입는 스타일과 외모와 사귀는 사람(또는 그런 사람의 부재) 기타 등등을 조사받고 비판받지 않을 자유, 그리고 혼자 있을 자유, 양심을 존중받을 자유를 원한다.
나는 살면서 완전한 타인들의 도움을 수없이 받았다. 아니 그 덕분에 많은 시간 많은 장소에서 살아남았다. 어떤 경우에는 내게 무슨 축복이 내린 건가~ 싶게 기적처럼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 나타나 도움을 준 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니, 어지간히 둔한 건지, 고집스러운 건지. 하지만 솔직히 현상을 짚어보면 그건 내 운에서 비롯되는 일이 아니다. 그건 도움을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이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확률적 타당성이 비교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후자가 더 높다. 그리고 다른 식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호의와 태도에서 아주 깊이 배운 바가 있다. 굳이 위계를 세우고 귄위를 드러내지 않아도, 집단주의 가치를 설파하지 않아도, 개인주의자들은 충분히 스스로도 타인들도 모두 존중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 수 있다. 한국은 정!이라는 정보를 듣고 뭔가 기대했다가, 아주 튼튼한 자기 울타리 밖의 타인에게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듯 무관심한 행동들에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아무 상관없는 이가 차 밑에 깔리면 사방에서 몰려들어 차 한 대쯤 번쩍 들어 구조하는 멋진 일도 동시에 존재한다. 단지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닌 훨씬 더 긴 일상의 시간들에 무심히 가하는 폐해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 전통이 깊은 나라들에는 동료 또는 가족 구성원 간의 상대적으로 약한 결속을 보완해주는 장치가 있다. 일례로 북유럽 국가는 통상적으로 높은 사회적 신뢰, 사회적 자본, 그리고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곳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 처한 낯선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같은 나라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의 공유 가치와 평등 의식이 높은 편이며, 자선활동도 활발하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바로 이것이 전통적 개인주의 사회 구성원들이,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집단주의 사회 구성원들보다 덜 외롭고 소외감을 덜 느끼는 이유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보다 넓은 공동체를 이루며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희미한 인식이 있어서다.
정부와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쳤고 그런 가운데서도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그럴듯하게 부정적인 하나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사회적 일체감은 월드컵이 열릴 때나 일본 정부가 자극적인 언행을 할 때만 조성되는 것 같다.
사회안전망이 약한, 한 번의 실패로도 인생이 결정 나고 회복탄력성이 낮은 - 고학력 전직 기업가, 사업가 노숙인들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 한국에서 사는 일의 고단함을 모르지 않는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 4년 차에 나는 범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언제나 불안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고 개인의 노력으로는 거의 대부분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었다. 또한 선택지가 거의 없고 있던 것들마저 계속 줄어들 것이란 실감이었다.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긴 미래에 나는 경제적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지, 재정 말고 다른 삶의 면면들은 어떻게 건강하게 채우고 성장시켜야 하는지 계산도 계획도 어려워졌다.
한국에서 발달한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재물과 대부분의 기회가 몇몇 일가에 집중된 결과 전망 좋은 신기술을 갖춘 중소기업 사주보다는 임대료를 챙기는 건물주가 되는 편이 나은, 유난히 불공평한 자본주의다. 냉소를 낳지 않기 어렵다.
두어 해 전에 서울에서 스타트업을 창업한 옛 친구와 만났다. 외로운 남자들이 인스타그램상의 여자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프로젝트도 부업 삼아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사용자들은 메시지 하나에 천 원씩 내고 “밥 먹었니?” “잘 잤어?” 같은 질문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배를 잡고 웃으며, 아니 그런 걸 돈 내고 사용하는 사람이 정말 있느냐고 물었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사업이 퍽 잘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미국 힙스터들의 안식처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커들 업 투 미(Cuddle Up To Me)’라는 업소는 2014년부터 시간당 80달러를 받고 손님을 안아주는 영업을 해오고 있다. 최고의 만족을 주기 위해 여섯 개의 테마로 방을 구분해놓았으며 선택할 수 있는 자세도 일흔 가지나 된다고 한다. 성적 접촉은 일절 금지다.
온라인에도 진출해(안아주기의 에어비앤비랄까) 등록된 수천 명의 안아주기 전문가가 손님을 기다린다. 내 고향 맨체스터의 온라인 커뮤니티 ‘커들 네트워크(Cuddle Network)’에서는 1200여 명의 회원이 정기적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나 몇 시간씩 서로를 안아준다(실망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안 가봤다).
일본에는 비용을 내고 안길 수 있는 카페들이 있는데 상대방의 눈을 1분간 들여다봐주기, 등 토닥여주기, 머리 쓰다듬어주기 등 성적이지 않은 선택 서비스도 제공된다고 한다. 중략. 여자들이 돈을 내고 잘생긴 남자 앞에서 울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곳에서는, 7900엔을 지불하면 미남이 눈물을 닦아준다. 창업주는 ‘함께 울기’ 행사도 열고 있다.
“전 세계에 621,585명의 친구가 대기중”이라는 웹사이트 ‘렌트 어 프렌드(Rent a Friend)’가 있는가 하면, 요즘은 대체 가족까지 렌트할 수 있어 ‘엄마 렌트’를 필요로 하는 뉴요커들은 시간당 40달러에 밥을 해주고 각종 충고와 정서적 지원까지 제공하는 63세 아주머니 니나 케닐리(Nina Keneally)를 빌릴 수 있다. 일본에서는 원하면 가족 전체를 렌트할 수도 있다. 또한 ‘패밀리 로맨스(Family Romance)’라는 곳에서는 친구와 대리 애인을 빌려주는데,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 많은 ‘핵인싸’로 보이도록 함께 사진 찍는 일에 서비스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정녕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는 징조 아니겠는가).
외로움 타개를 도와주는 상품도 있다. 가격이 200달러에 달하는 중량감 담요는 “안기고 보듬어주는 듯한 느낌을 유발해 신경체계를 이완시킬 수 있도록 체중의 7~12퍼센트 무게로 설계됐다”. 중략. ‘남자친구 담요(Boyfriend Blanket)’란 이름을 단 경쟁 상품이 출시되기도 했다. 본래 자폐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앓는 사람들을 위해 있던 것이지만, 지난 5년간 구글 검색 횟수와 매출이 급격히 증가했다.
외로움을 덜어주는 약물 개발 연구도 한창 진행 중이다..
앞으로는 어쩌면 외로움도 증후군이나 질병으로 여겨져 치유 약물이 개발되는 등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해결책이 개입할지도 모르겠다. 중략. 가족과 친구들이 퇴장한 공간으로 이미 시장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도 슬프지만, 정서적 유대를 제공하는 것 또한 차츰 누군가 돈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다.
전혀 모르던 내용이라 SF의 내용인 듯한 이 산업들이 모두 현업 중이란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중량감 담요,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니 솔깃하다.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두고 온갖 보조공학 제품들이 팔리는 것처럼, 외로움 역시 판매 시장이 커질수록 수익성이 높아질수록 불가역적으로 약물 상품들이 개발 판매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말해보면 타인과 충분한 정서적 유대를 안전하게 키워나가는 일의 수고에 비해 ‘제품들’의 가성비가 좋다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효과가 있어도 없어도 역시 서글프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는, 중략. ‘그 관현악단에 반드시 입단해야 해’ 하는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머스터베이션musturbation’이라는 재미있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한국보다 머스터베이션의 손아귀에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린 나라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뼈아픈 현대사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고도의 경제성장, 높은 교육수준, 해외에서의 인정 같은 성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절감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지향이 한국인 개개인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부모의 경제적 부담과 자녀의 정신건강 문제를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려는 맹목적인 노력에서부터 한국인의(그게 누구든 어쨌든 한국인이면 된다) 노벨상 수상 여부에 대한 언론의 집착까지, 이 나라는 필사적으로 결과에 연연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표절, 자료 위조, 경쟁자에 대한 고의적 방해 같은 반사회적 행위를 더욱 부추긴다. 그뿐 아니라 이런 풍토는 대부분의 사람을 실패자로 만든다.
must-urbation. 한국 사회에서 불안을 양산하는 많은 원인이 바로 한탕주의 입시에 기인하다는 것을 통감한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이후에도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승진 등등등 등등등 끝없는 지옥의 관문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외모 관리도 하고 재테크도 해서 내 집 마련도 빚 내서 해야 한다.
중언부언이지만 성취 지향적 요구와 압박은 강하고 사회안전망은 약하니 자살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절규는 맞는 말이다. 사회적 조건화가 이만큼이나 강한 상황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인지하고 적응하고 망가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많이 오래 하는 이레 우왕좌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조바심을 낸다.
우리 누구나 장점을 갖췄지만 기막힌 단점도 많다. 게다가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결함이 있는 두 사람의 성교를 통해 생겨난 결함 있는 산출물로서, 무척 중요해 보이지만 다른 시대나 장소의 관찰자가 본다면 무의미하고 사소할 온갖 부침을 헤치고 살다가 결국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 스치고 지나가는 아름다움과 기쁨의 순간들처럼 이런 사실도 받아들일 때 더 행복할 수 있다.
이후로도 해외 이민자로서 현지 언어를 대하는 태도, 의학과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 삶과 의미에 관한 관점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고 시선이 날카로우면서도 종합적이다. 그리고 뜻밖에(?) 저자는 적어도 사상과 의미 체제 내에서는 꽤나 자유롭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처음 만난 저자가 제목에 표현한 모든 소망을 다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원할 때 굳이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일상에서 충분히 고독할 수 있기를, 동네를 지역을 산책하는 길에, 원하는 깊이만큼 한국 속으로의 산책도 이어지길, 바라는 대로 이방인, 혹은 김치 잘 먹는 바보 취급당하지 않고 신기할 것 없는 이민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기를 응원한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들이 가득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때 나는 오후 4시가 되면 고독한 이방인으로서 영국 숲길 산책을 다녔다. 거의 매일 나타나 따라오는 붉은 가슴의 작고 통통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다스러운 새도, 가끔 사냥에 열중하느라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던 여우도, 짙은 안갯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위용을 보이던 큰 뿔 수사슴도, 길가에 현란하게 피어나던 폭스글로브들도, 마늘 향을 뿜어내던 야생 마늘 흰 꽃들도, 하늘로부터 새하얀 깃털을 발 앞에 정확히 떨어뜨려주고 강물 위로 내려앉던 흰 고니들도, 어느 날 부딪쳐 놀라 주저앉은 나를 보고 전리품인 양 눈앞에서 유유히 털 모자를 물어 간 족제비와도 조우했다. 좋은 일도 기쁜 일도 감사한 이들도 많았지만, 귀국한 후 몇 해가 지나도록 오후의 햇살과 풍경과 향기와 그날그날 혼자인 내가 한발씩 디디며 맛본 온갖 감정들이 가장 그립게 떠올랐다. Homesick이랄 수는 없으니 nostalgia가 맞겠다. 여전히 눈물 정도는 고일 만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