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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몽 3 - 춘몽의 결結
남영로 지음, 김풍기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20년 12월
평점 :
책 소개를 처음 읽었을 때 조금은 당황하고 놀랐다. 약 200년 전 지어진 장편소설로 조선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린 작품? 내용이 한 줄도 기억 안 나니 전혀 모르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작가 남영로? 또 나만 모르는 분이시구나.
1, 2, 3권 세트 작품인데 일단 쪽수는 이러하다. 512 + 544 + 560 일단 한시처럼 읽히는 두 줄 목차들이 멋지다. 1권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인명을 기록 정리하는 일 - 요즘엔 이 단계 없이 책을 잘 못 읽습니다. 세월이 야속합니다 - 을 말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얼마 안 읽었는데도 “전생에 읽었던 책인가" 싶게 속도가 붙는다. 쪽수에 걸맞은 방대한 서사는 기본이고 각종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한데 반전 역시 거듭되니 “다음 회를 보시라”는 저자의 주문과도 같은 말에 본 적 없는 사극을 몰아보듯 책장을 넘겼다.
“물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라 할만 했다.”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달빛은 서쪽으로 기우는구나. 예부터 이 정자를 오른 재자가인이 몇이나 되는가. 지금은 그 종적을 물어볼 곳이 없구나. 다만 빈산에 흰 원숭이와 대숲의 두견새만이 고금의 흥망을 비웃나니, 뜬구름 같은 인생살이가 어찌 가련치 않은가.”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인물 캐릭터들이다.* 1840년 조선시대에 쓰신 거라 하지 않으셨나요? 19세기 조선양반남성이 지은 책이 아니라 최근에 19세기 배경으로 쓴 소설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겨 책소개를 다시 들여다볼 정도로 여성 캐릭터들이 능동, 적극, 당당, 승승장구하는 신박한 이야기이다. 전형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벗어난 캐릭터들, 검열 생각나는 거침없는 말투, 비조선현실적인 무협 액션, 추리스릴러범죄소설인가 싶은 반전들, 그리고 뮤지컬인양 등장하는 노래!
* 주요 캐릭터는 옥황상제와 남주인 선관 문창성(양창곡) 그리고 다섯 명의 선녀들 - 홍란성(강남홍), 제천선녀(벽성선), 도화성(일지련), 제방옥녀(윤소저), 천요성(황소저).
“옛말 목란은 아버지 대신 출전하여 만 리 밖에서 종군했지만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낭자는 어째서 그 문제에 얽매입니까?”
책 소개에 무협로맨스판타지, 걸크러쉬, 페이크주인공 소설이라 해서 뭐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다 있다. 악당은 반드시 물리치니 속이 시원하고 - 제발 현실에서도 좀 느껴보자 -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막 빠지고, 그릇된 사회 인식과 제도에는 안 참고 대사로 퍽퍽 때린다. 할 일을 다 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으며 잔칫상 차려 즐겁게 놀며 지낸다.
읽다 보면 와, 나도 이렇게 보람 있는 일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모여 잘 놀며 인생 꽉 채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니, 그 당시 독자들 - 특히 여성 독자들 - 은 집 팔아 “다음 회‘를 사서 읽어 보고 싶었을 거라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간관은 조정의 귀와 눈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간관을 엄하게 견책하시어 귀와 눈을 막으시니,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폐하의 문제점을 들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한때 마음을 푸시는 것이라면 잘못을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셔야 하는데, 도리를 지키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기에 언관에게 죄를 주고 대신을 쫓아내 조정 관료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기운을 꺾어 버리시는 것입니까? 친구 사이라도 곧은 말과 선을 경계하여 꾸짖는 말을 모두 어렵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폐하의 신하들은 생사고락이 폐하께 달려 있고 재앙과 복과 영광과 욕됨이 또한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어찌 폐하께서 듣고 싶어 하시지 않는 말을 해서 폐하를 거스르고 스스로 엄한 책임을 자초하겠습니까?
“명나라 최고의 장수이자 양창곡 원수가 평생 총애하는 여인”인 여주 강남홍의 성격은 그야말로 호쾌하고 강직하다. 취미는 남주 놀리는 것이다. 특기는 쌍검술과 변신술이다. 이 작품 속 여성들 형편은 여성들은 현대문학의 소수자 캐릭터와 비교해도 꿀릴 바 없이 서러운데, 완전 반전으로 활약 비중이 거칠 것 없이 웅장하다.
뛰어난 검술과 전략으로 전쟁터를 누비며 군사들을 지휘하는 여성, 불필요한 살생 없이도 연전연승하는 장수. 임금의 신의를 독차지하고 자신을 비웃는 자들은 도술로 골려 주고 희롱하는 적은 당할 자 없는 검술로 혼내 주는, 선비만큼 학문도 갖춘 여성. 이 정도면 현대 문학에서도 잘 안하는 수준의 성역할 바꾸기이다.
“저 역시 강남 사람으로 만리 남쪽 하늘에 떠돌아다니던 신세였고, 북방 외딴곳 바람 먼지 지루한 속에서 온갖 고초와 위험을 겪었습니다. 이제 이 산에 올라 지난 세월을 굽어보니 뱁새가 달팽이 뿔 위에 둥지를 틀고 메추라기가 쑥대에서 노니는 듯합니다. 낭자들은 저 중원 땅을 보세요. 손바닥 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부터 영웅호걸들과 재자가인들이 저 안에서 태어나 자라 저 안에서 사라집니다.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을 어찌 다 논하겠습니까?”
“성질이 서로 다르고 각각 혈기의 차이가 있는데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마음속의 즐거움과 칠정의 욕망을 억지로 억제한다면, 기품이 부족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하루살이 같은 기상을 가지게 되고, 기품이 넉넉한 사람은 끝내 겉을 꾸미고 안을 속이게 됩니다. 그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의관을 정제하고 우러러보는 군자지만, 그 마음을 논하고 쓰는 것을 살펴보면 고루하면서도 들은 것이 적어 당면 문제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사람의 성취는 모두가 다른 것이라, 하나의 법규로써 논의할 것이 못 됩니다.”
부패한 과거제를 목격하고 좌절하고 염세하는 작가의 서러움이라면 차라리 홍길동전 식의 활약이 본인의 입장에서 더 속 시원할 듯한데....... 작가님! 정체가 무엇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새해를 맞아 차분하고 기품 있게 고전소설을 읽어 보나 했는데, 한자어와 우리말의 용법과 의미가 새롭게 환기되는 점을 빼면 만화방에 앉아 베스트셀러 읽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무엇일까. 싫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가 지었는지, 왜 널리 사용되는지 정말 싫지만, ‘집콕’을 하는 형편에 일의 능률은 점점 떨어져 매일 야근하는 원치 않는 패턴이 생긴 일상에서 한숨과 근육통만 늘어 가는데, 이 나라 저 나라 다니고 천상과 지상을 넘나들고 마주치는 벽은 모두 부수며 본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미려한 표지만큼이나 눈부시다.
“다 같은 청춘의 젊은 나이에 풀잎 끝의 이슬 같은 인생이 서로 시기 질투하다가, 날아드는 나방이 등불에 부딪힘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한바탕 꿈인 것이지요.”
구성과 표현력과 개성을 고루 갖춘 멋진 소설 작품이다.
또한 백만 년 만에 만나보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