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 근대의 문을 연 최후의 중세인 클래식 클라우드 26
이길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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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재색겸비를 갖춘 책들이랄까군더더기도 과장도 없는 팩트 제공에 적절하고 반가운 사진과 그림편집 방식까지 눈에도 마음에도 반갑고 어여쁘다그러니 책 읽는 일에 힘이 덜 들고 즐거운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분에 적극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일조차 힘겹다면 [루터] 읽기는 오디오클립도 제공되어 있어 여러모로 좋은 배움의 기회이다.

 

저자와 저서와 대표적인 업적을 줄긋기로 외우던 교과서의 단편 지식으로 만나애써 제대로 공부해본 대상이 아니라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잘 아는 것 같은 인물들 중 한 명이 루터이다몇 해 전인가 [위대한 여정]이란 영화로 유럽의 종교 개혁 당시의 분위기를 엿본 적이 있지만 그 역시 제한적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정치혁명이나 과학혁명에 비해 저평가된 역사적 사건들은 무수하다그 중에서도 조선의 한글창제를 떠올리게도 하는영향을 미친 범위와 역사를 보자면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지식혁명과도 같았던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인류사에 좀 더 진한 필체로 기록해 두어야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집 안 분위기라 아주 어릴 적엔 할머니께서 차분하면서도 곱게 차려 입으시고 미사 보러 간다.”고 하시면 누굴 보러 어디를 가시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좀 더 커서 그 표현이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로만 통용되던 성서와 미사예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보러’ 갈 수 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것 마냥 놀라기도 했다.

 

지금도 글을 모르는 분들이 계시니 천주교가 선교 전파되던 그 시절엔 마치 중세 유럽처럼 한동안 미사를 보러 가서 말씀을 듣는 것 이외에는 접근이 어려운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미사는 동서양에 거쳐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은 그저 보러’ 가는 그들만의 잔치였다.

 

그러니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유통함으로써 비로소 많은 이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 루터의 업적은 저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개혁사의 기록이자 역사적인historic 인물의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밖으로 나가 가정의 아낙네들거리의 아이들,

시장의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보았다가 그런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자기들에게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제임스 레스턴루터의 밧모섬

 

보통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번역하라는 것은 현대라면 도서정가제로 인한 판매수익을 위해서라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으로 파격적인 사고의 전환이고 실행이었을 것이다더구나 스스로 성서 번역을 하면서는 삽화들을 넣어 메시지를 전하고 찬송가 역시 쉽게 읽히고 따라 부를 수 있게 한 옥타브의 음계로만 작곡했다고 하니루터는 단지 독일인답게(?) 성실한 것만이 아니라 천재적인 미션 수행자로 보인다.

 

이렇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는'이가 세상을 바꾼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달리 표현해 독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번역된 성서를 펴내어 누구든 읽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국 독서를 통한 소통의 승리다.

 

문득 새 시를 한 편 쓸 때마다 시장 상인들을 찾아가 자신의 시를 들려줬다는 두보가 생각난다. "뭔 소리냐"는 핀잔을 받으면 "좋다"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시 호흡을 좀 고르고업적으로 달려가기 전에 당시 전반적인 유럽의 상황을 차분히 살펴보면 루터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성향과 결심과 목표가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페스트는 유럽에서는 14세기 처음 발발했고, 1340년대에 대략 2500만 명의 유럽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당시 유럽 인구가 75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중 3분의 1이 이 병으로 죽어 간 셈이다정작 이 병이 페스트라는 이름의 균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무려 500년 정도가 지난 뒤였다수많은 이들이 죽어 갔지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2020년 말에 잠시 확인해보니 어느 날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들 중에 9초에 1명씩 사망한 분들이 있었다고 한다지금도 상황이 더 좋아지진 않았을 것이다작금의 현실과 겹쳐져 페스트에 당하던 유럽사회의 모습이 더 이상 과거에 종결된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다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이 부재해서 더 두렵고 종교와 미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비해지금은 그래도 백신과 치료제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형편이 조금 나아보이긴 한다하긴 그 정도 여유라도 있으니 온갖 패악들이 여직 그치지 않는 것일 테다.

 

중세라는 유령의 숲에서 루터는 죽음과 질병에 대한 공포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신앙인이었다루터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하여 지속해서 신을 찾았다남들보다 몇 배 이상 많은 시간을 고해실에서 보낼 정도로 그는 신에게 집착적으로 매달렸다하지만 그때마다 신은 엄중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오죽하면 그는 그러한 심판의 신을 저주했다고까지 했을까.

 

결국 루터가 갈구한 구원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것이었다전통적 신앙 방식이 주는 편안한 형식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양심의 불편함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다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신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어쩌면 그의 이런 불안한 양심이 그로 하여금 세속적 출세가 보장되는 법학도의 길을 걷지 않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그를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가 세속인으로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즉 루터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이 절정에 달한 엄혹한 시절에 태어나 문득 이 세 가지가 인류사에서 중단근절된 것이 있었던가 싶다만 지긋지긋한 클리셰처럼 당연히 귀족들은 부어라 마셔라 화려한 삶을 살면서 현생의 부도 천국의 자리도 우리끼리 차지하자는 욕망이 가득한 불평등한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자꾸만 이 시대상이 고치지 않고도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듯해서 소름이 돋는다죽음을 신의 형벌로 선전하며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행위가 여전히 예수천국 불신지옥 등등으로 온존하니 그 오랜 세월이 무색하다.

 

그런 기독교 계급이익공동체에 반해 루터에게는 오히려 인간개인나 자신양심이라는 근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각이 생겼다그들의 신에만 의지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삶보다 불안하지만 현명하고 올바른 성서 제대로 읽기와 번역과 유포를 통해 성서에 충실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목적에 보다 적합한 종교를 향한 루터의 선택과 여정이 뭉클하다.



루터는 성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513년부터 성서학 교수로 비텐베르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탁월한 소통 능력 덕분에 교수 루터는 큰 인기를 누렸다그는 강의 시간에 독일어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당시 대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였지만루터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독일어에 가끔 욕설까지 섞는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이러한 행동은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계산한 것이었지만그의 불같은 성정도 한몫했을 것이다그 어려운 스콜라철학마저 루터의 입을 통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이런 인기 덕분인지 유럽의 많은 학생들이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하고 싶어 했고, 1515년부터 1520년 사이에는 그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이 점 역시 대학을 세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매우 흐뭇한 일이었고루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 주요 이유였다.

 

선구자나 개혁가가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이야기들은 읽기가 우울하고 힘겹다다행히 루터는 자신의 노력이 가장 큰 동력이자 이유이지만 소통능력이 탁월하고 독일어를 사용했음에도 명강의로 평가받고 필요한 지원도 확보했다니 읽는 마음도 편안했다역사 속에 이런 일이 당연한 듯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즈음 그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제대로 푸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게 되었다성서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신의 뜻이 아주 분명하고 선명하게 담겨 있는 책이다성서만이 성서의 메시지를 풀어내는 최고의 근거가 되었다루터에게 성서란 전혀 어렵지 않으며 노력하여 기록된 문자와 그것의 문법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성서의 메시지는 분명히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 루터는 확신했다.

 

이렇게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완성해 갔다성서를 원문으로 읽으며 얻은 자긍심과 권위까지 갖추게 된 루터는 중세의 한복판에서 매우 낯선 주체적 개인이 되어 갔다.

 

외부의 영향이나 다른 계산다른 목적의 동기 부여 없이 연구 대상만을 보고 제대로 탐구해보는 드물고도 귀중한 기회 역시 가능했다루터의 능력으로 이룬 일이겠지만가짜뉴스가 바이러스 확산 속도보다 더 빠르게 유통되는 기막힌 현실에서사실과 진실이 정답이자 가장 힘이 세다라는 역사적 사례를 읽게 되어 기운이 난다.

 

누군가 알려 준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고 내용을 확인해서 성서에 기록된 신앙의 핵심을 정확히 깨우치고 그것을 다시 글로 옮겨 전한 것이 오랜 세월 모르고 살았던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의 전체적인 모습이자 요체였다.

 

다시 한 번 ~카더라…… 아무리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내용일 지라도 망설임 없이 유통되는 작금의 사태에 비해 남들이 오도하는 말 말고 내가 직접 읽고 확인하고 오류를 고쳐 세상에 전하는 일그 바로잡음이 역사를 바꾼 중요한 실천이라 믿는다.

 

지금의 우리가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루터'라는 한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곤란하다그보다는 그가 어떤 시대어떤 문화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런 일을 했는지를 반복적으로 되물어야 할 것이다결국 인간은 역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저물어 가는 중세의 끝자락에서 올곧게 한목소리로 신의 은총을 기리는 주체적 자아를 외친 루터를 잊어서는 안 된다아울러 성서를 읽으면서 찾아낸 진리를 이웃으로 확장하려 했던 그의 투지도 기억해야만 한다



드디어 조각지식정보들이 온전히 자리를 찾아갔구나 싶어서 읽고 나니 기쁘다이 책이라면 도전한 누구라도 힘들지 않게 잘 읽고 배울 수 있을 듯해서 또 기쁘다이제야 영화의 제목이 왜 [위대한 여정]이었는지 감정 이입이 좀 된다시대를 도저히 거스르며 나아간 긴 여행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과 깊은 의미에 감동받을 수 있어 벅찼다참 오랜만에 거대담론의 분위기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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