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 한국 의료의 커먼즈 찾기
백영경 외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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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고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안들이 있다이때 단편적인 지식 정보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판단해보는 기회를 주는 독서는 특히 귀중한 계기가 된다더구나 주제가 지극히 현실적이며 작금의 생과 사를 다루는 시의성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매일이 불안하고 내일도 불안한 시절에그래서 계획과 정책과 실행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한 때에 도움이 되는 책이 출간되어 심신의 불안과 체증이 다소 해소되는 듯했다.

 

목차만 봐서는 분야별 의료 전문가들과의 대담 내용이 다 인가 싶지만아주 기본적인 팩트부터 현장 상황정책선입견과 세계관에 이르는 통합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결론과 대답이 자신의 의견과 모두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여정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배웠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들었다.

 

병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 있나요?

 

아주 간단하고 평범한 사실이라 미처 그 경험을 대한민국 의료현실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병원에서 태어나고 사는 내내 의료를 소비하다 병원에서 죽는 우리들. 그래서 물어야 하는 질문,

 

한국 의료는 사람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습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재벌자본의 의료시장 장악의사파업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현장의 의료, K-방역과 인권의료 사각지대낙인화된 질병 등의 핵심 내용들이다뭔가 억울하고 이상하게도 이렇게까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나 싶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읽다 멈추다를 반복하고 생각과 호흡을 천천히 하며 책을 읽다 보니 두서 없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0을 기록할 때도 있었던 여름 한 때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를 시청하게 되었다임상 의학이 아니라 예방 의학 전문가이자 국립암센터에 근무하는 기모란 교수의 답변으로 진행되었다역학 조사공공 의료에 대한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듣는 기회였다지방의 병원 부족과 특히 그에 따른 산모와 신생아 사망률 증가라는 결과에 비추어 서울에는 카페보다 병원이 많다는 통계청 자료는 놀라웠다.

 

아무래도 AC(After Corona) 시절을 살며 새롭게 만들어야할 의료 체계는 보건 의료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판데믹이 언제든 가능한 국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에 큰 질병과 감염병은 최대한 사전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예방책을 예상하지 않으면 손 쓸 도리가 없어질 것이다이제 의료는 복지가 아니라 안보의 영역에 들어선 듯하다. 어쩌면 코로나 판데믹을 거치며 존망을 위협 당하는 국가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명목상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의 의료가 거의 민영화되었다는 사실도 코로나를 겪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인구 1200만 명이 사는 우한시에서 코로나 확산 시기에 환자를 받은 병원은 단 3나머지는 다 영리병원즉 민간병원이었다고 한다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을뿐더러 국가가 의료문제를 포기한 상태라는 의견도 들었다끔찍하다.

 

대한민국이 공공성이 튼튼하고 강한 국가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안타깝게도 내 생각만이 아니라 현실도 그러하다공공의료시설 비율 OECD 국가 평균은 73%, 의료 불평들이 심각한 미국은 27%, 일본은 22%, 한국은 10%이고서울은 시립국립 병원이 4%이다대전광주울산은 광역시임에도 공공병원이 없다민간 병원의 년 수익은 보통 1조이며병상은 3000개 정도이다병상 하나에 3억 이상을 벌어야 한다그러니 평소에 활용할 수 없는 음압병상을 만들어 두고 1년에 3억씩 손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병상 부족이 연일 보도되지만 병상이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의료진이 더 필요한데 감염내과를 제대로 갖춘 공공병원이 없으니 인력을 배치할 수가 없다의사에 비해 수련과정이 필수가 아니기 때문에 빠르게 개원할 수 있는 치과와 한의사 배출 인원이 늘고 있고, 2022년에는 치과전문의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꼭 필요한 치료분야이긴 하지만현재 판데믹을 헤쳐 나갈 의료진 모집 분야에서 제외되는 직군이 치과의사와 한의사이기도 하다.

 

공공의료와 보건의료에 필수적인 공공의료병원과 중앙감염전문병원국립의약학계열전공의료진들의 증축과 증원이 시급해 보이는 형편이라 실제적인 관심과 고민과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쉽지 않을 난제임에는 분명하다가족 친지들 중에 분야가 다른 의료진들이 세 명인데모두가 타당한 이유로 의견이 다르다그리고 충분한 예산이 있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한 차례 뒤흔든 지난여름 의사파업. 정부의 공공의대 도입 방침에 반대해서 벌어진 전공의 파업 사태로 의료 공공성의 문제가 한국사회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나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한국의 의료 공공성 문제는 당위의 수준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아무 도움도 안 되는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욕설들이 가장 눈에 띈다정부의 정책과 사업은 시민들 의견과도 의료진 의견과도 다른 노골적인 의료산업의 거대한 육성으로 향한 듯하고 예산도 공감도 없이 첨단기술 논의들만 꽤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다관련 예산 확보도 없는 듯하니결국에는 손 털고 거대 민간 자본에 맡기겠다는 작정인가 싶기도 하다.

 

재난이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인권의 문제이듯질병 역시 늘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영역이었다건강과 의료는 유전자와 세포의 문제가 아니라가정직장사회국가 안에서의 사람들 간의 관계의 모습들이 연계된 주제이며오늘날은 기후재앙환경 정의의 문제로 영역을 확장해야 전체적인 모습이 비로소 완성되는 분야이다그런 줄 몰랐다고 할 분들이 없을 듯해 쓰고 나니 민망하지만 어쨌든.

 

의료 문제의 가장 큰 근원은 공급자와 수요자의 지식 차이가 현저하다는 것입니다이를테면 커피는 맛없으면 사람들이 안 가서 그 가게는 자연히 문을 닫게 되지만 병원은 공급자가 수요자를 창출할 수 있어요. MRI사진 보면서 의사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누가 그걸 거절할 수 있을까요최원영

 

양약도 기본적으로 70킬로그램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몸무게 가이드가 나와야 합니다윤정원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민간의 역할우리가 바라는 의료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공공병원이라는 하드웨어에 치중하기 쉬운 논의를 비판적으로 살피며 결국은 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 강조놓치기 쉬운 소수자와 여성을 위한 의료의 영역좁은 의미의 의료라는 틀 깨기그간의 공공의료 논의와 정책 방향을 비판적으로 검토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시면 정말 중요한 정보와 주장들이 많으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있고스스로도 그러한 낙인을 내면화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아픔을 숨기고 살아갑니다이지은

 

돌봄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필요한 삶의 필수 요소라고 이해해야 합니다필요한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정의로운 상태일 것입니다김창엽

 

특히 하나마나한 얘기들만 주구장창 언론에서 반복되는 이유를 속 시원히 짚어주는 대목이 가장 마음에 든다추상적인 차원의 공공성은 동의하기 쉽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은 껄끄러운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또한 대담 형식은 더욱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주제를 다루는 느낌을 주었고 분명 따라 이해하기 더 쉬운 장점이 있었다.

 

어느 문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특히나 의료 문제는 한쪽 끝을 잡아당기니 한국 사회 전체의 모든 묵은 문제들이 끝없이 딸려 나오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아무 보탬도 안 되면서 쓸데없는 유포되는 저속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말고 좀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태도를 갖추는데 적어도 내게는 무척 유용한 길잡이가 된 책이다대부분 그렇듯이 잘 될까 염려 가득하고 복잡한 심정이지만 읽기 전보단 훨씬 더 객관적인 불안의 내용을 갖게 되었다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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