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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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성 흡혈귀 주인공이 뭔가 낯설지만 작가도 언급했듯이 여성이 주인공인 모험이야기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라 시도조차 드물다흡혈귀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단함을 생각하니 어떻게 잘 숨어서 잘 위장해서 잘 살아가고 있나……부터 궁금해진다.

 

무려 1930년대 경성기숙학교 교사로 근무…… 배경 설정부터 완전히 새롭다흡혈마전이란 제목 때문에 설마하니 흡혈귀 무협(?)이 펼쳐지는 건가 잠시 긴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십자가와 햇볕에도 끄떡없는 흡혈귀가 새롭고이로써 흡혈귀는 마늘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또한 증명된 듯하다그리고 사감 선생님의 뾰족한 귀와 붉은 눈동자를 신비로운 분위기라고 정리하는 학생들이 엄청 쿨하다.

 

계월 같은 자들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니?”

……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어쩌면 말이야

너처럼 묻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거야

그게 세상이 변해 간다는 증거일지도 몰라중략

 

일제 식민지라는 배경의 그림자가 너무 크고 짙어서흡혈귀의 존재가 아주 미미한 위협처럼 잘 부각이 안 된다(고 저 혼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여성으로 부딪히는 일들은 현실 역사를 조금만 뒤져봐도 흡혈’ 정도는 저리가라 할 정도이니나는 계월 주인공 흡혈귀 과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따라갔다.

 

광복 연수만 세면 뭐하나당시 13살 언저리 아이들 억울함도 아직 못 풀어 주고 있는데반복해서 모욕만 더 가하고 있는데……싶다어쩔 수 없이 읽는 내내 슬프고 아프다문장력이 주는 가독성이 덜했다면 더 자주 읽다 멈췄을 것이다.



손녀를 유언을 통해 간절히 교육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할아버지의 소망과는 동떨어진 교육환경이 너무나 안타까웠다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지만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마저 일본 정부의 눈치나 보고 일본인 선생들에 의해 좌우되고 당연히 일본어만 사용해야 하고 조선이 당연히 일본 것인 것처럼 여자는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친다.

 

좋은 가정부인이 되어 남편을 위해 아름다운 자수를 놓는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조선 여성이 응당 몸에 익혀야 할 미학입니다.”

 

하지만 여성도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배울 수도 있지 않나요?”

 

외롭고 고독한 주인공에게 필적할 능력 혹은 휘둘리지 않는 특별한 힘 -을 가진 또 다른 주인공의 등장은 여러 작품들에서 반복되어도 반가운 플롯이다하지만 자연스러운 성장처럼 능력의 각성을 이루는 14살 임희덕의 존재는 단순히 감정의 교류나 위안에서 그치는 설정이 아니다계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특별한 존재이자만주로 떠나는 계월의 신분을 보장하는 유일한 존재가 희덕이다.


중요한 건자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야

당연해 보이지만 연습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더구나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디즈니에서 시도했던 왕자가남자가 없어도 괜찮아!’ 정도의 여성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는 더욱더 선명하고 확실하고 통쾌하게 변주된다.



또한 마음에 들고 안심이 되었던 구성은 작가가 시대적 배경에 갇힌 전형적인 캐릭터들만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아버지는 친일파이지만 나는 정의롭게 살련다하는 희덕의 절친 경애는 작가가 가진 인간관의 너른 품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외에도 미디어영상작품들에서 신스틸러라 불릴 만한 다양한 인물들이 깨알같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다어쩌면 다양한 인물군도 만주하와이상해에 이르는 지역적 배경들도 사건의 집중도와 몰입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나는 풍성한 설정들이 마음에 든다.

 

연령과 직업이 다양하지만 폭력적인 언사도 행동도 없는 여성들 간의 모습도 편안했고역사 속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잊히거나 지워진 이들에 대한 발굴처럼 여성독립운동사의 한 대목처럼 전개되는 내용에도 마음이 뻐근해져왔다.

 

불과 얼마 전 한국미술사 책을 읽다가 다시 만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다른 한국 근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들도 많은데 과문해서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 소제목 구성도 놀랍고 반가웠다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쓰자가 아니라 아주 세심하게 많은 공을 들여 하나하나 써나갔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무자극적이지만 유쾌하고 흥미롭고 진지한 이야기 장치들이 새로운 의미의 역사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를 재정의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화란이 그러는데누구나 살아남는 데엔 이유가 있을 거래요.”

그런 말을 했어?”

계월은 살아남았잖아요그러니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만들어 나가요.”

 

어쩌면 이런 게 나 같은 사람의 운명인지도 몰라

쫓겨난 자들을 거두어 보호하고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율하는 것 말이야.”

 

다 읽고 나니 태어난 이유와 살아남은 이유를 찾아가던 소녀들은 모두 다 성장하여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결정을 다 내리고 세상에 뛰어 들었는데나만 계속 성장이 멈춘 채로 10대로 살아가는 듯해 낭패감이 든다.

 

마지막으로더 이상 '영'하지 않으면서도 영어덜트 문학 장르를 좋아하고 재밌게 읽는 독자로서 이런 저런 아쉬운 나름의 이유들이 남았다이 작품이 작가의 본래 스케일에 걸맞게 흡혈마전 시리즈 2탄의 소식으로 계속 써지길 바란다참고 도서 목록들로만 짐작 해봐도 작품의 바탕이 된 자료들도 많고 고민한 시간들도 길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공들여 창조해낸 세계는 이제 겨우 풍성한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축해 두었다. 부디 다음 편에서는 결정을 내리고 가야할 곳을 찾아 나선 해야 할 일을 하러 떠난 인물들이 어떻게 활약하는지를 들려주시길 바란다. 궁금한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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