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드레스메이커 비룡소 그래픽노블
젠 왕 지음, 김지은 옮김 / 비룡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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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이란 장르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어느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긴 했다이 책은……어떻게 소개해야 잘 소개할 수 있나 고민이 될 정도로 마음이 기우는 책이다내용을 살피는 게 목적이라면 금방 읽을 수도 있겠지만천천히 읽으면서도 어느 새 12장이 끝나가니 진심 속상한 그런 작품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력적인 책이다시작은 내가 과도한 애정을 보였으나점차 아이들이 더 오래 이야기하고 더 빨리 다음 장을 보고 싶어 했다작가는 어떻게 이런 자연스러운 이야기 장치를 마련했을까드레스를 사랑하고 입기를 즐기는 세바스찬과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가 입을 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프랜시스(*원작에선 seamstress, 번역본에선 dressmaker) 


 

이런 구성이 얼마나 많은 비극과 폭력과 저항을 경험하고 등장한 플롯이라는 걸 안다고 생각하는 나만 어색하게 감동 받고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아이들은 프랜시스처럼 세바스찬이 드레스를 입는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 들였다그리고…… 그런 모습이 라떼는’ 세대인 나에게는 살아 온 보람이고 감동이다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빌어먹을 사장님 밑에서 일하던 걸 그만두고 왕자님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여기 왔어요제가 왜 다시 돌아가겠어요?

이상하지도 않아?

무슨 차이가 있어요이건 제가 꿈꾸던 일인 걸요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어요.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모습도 벅찬 장면이었다그래픽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원체 남의 일에 시큰둥한 성격 탓도 있지만유학 시절 크로스드레서(crossdresser)를 보아도 별다른 거부감이나 판단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그게 뭐 별스런 일인가 싶기도 했다별나기로 따진다면야 피부나 털이 부실해서 온갖 가지 옷을 차려입는 인간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별난 종족일 것이다.

 

어쨌든지금도 성별에 따른 드레스코드는 고루할 만큼 경직되어 있으니, 드레스 취향의 왕자보다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한 재봉사 프랜시스가 별난 인물일 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왕자 세바스찬은 자신이 왜 여자 옷을 좋아하는지 모를뿐더러 단지 좋아하는 마음이 들 뿐이다그냥 좋으니까 좋은 것이다.’ 이야기는 군데군데 까딱 잘못하면 뻔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는데그런 대목마다 예상외의 내용이 펼쳐진다.

 

예를 들면, ‘왕자’ 세바스찬은 자신을 부정하지도 않고 억누르려 하지도 않고단지 자신의 지위와 조화할 수 없다는 것만 갈등한다독자로서 나는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현상으로 존재하지만나는 나 스스로를 인정한다세바스찬의 내면은 흔들리지 않는다그리고 묘하게 이런 점은 부자가 닮아 있다.

 

시대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새 시대 왕의 힘이 약해지고 근대가 시작되는 무렵의 파리 에 왕정이 맞닥뜨릴 위기감을 체감하는 왕이자 아버지로서의 안목이 왕자의 선택에 대한 그의 태도와 입장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천편일률적이거나 비슷비슷한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그보다 훨씬 더 무게중심이 기우는 쪽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가끔은 가능성과 기회가 벅찰 만큼 가득하고 혼란스러운 젊음이 아쉽고 부럽기도 하다가그래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던 힘겹던 시절에서 여유로운 이 나이가 편안하다이제 더 이상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로 눈물이 쏟아지지도 가슴이 찌그러지지도 않는다.

 

이들이 어떤 어른들이 되었을까 궁금한가요아닌가요?

 

지금까지 내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만 가능했어.

그들이 다 결정했지.

무엇을 입으면 우스꽝스러운지는 이제 내가 결정하고 싶어.

 


그렇지만 나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은 모두 바느질 덕분이었어요.

그래서 난 가끔 내가 바느질을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요.

 


내가 처음으로 진실을 알게 됐을 때나는 세바스찬의 인생이 다 망가진 줄 알았다.

그런데 프랜시스너를 본 순간 모든 게 괜찮다는 걸 깨달았지.

왜냐하면 누군가는 여전히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그냥 막 좋았던 장면. 맥락 없이 넣었습니다.

 

이 작품 말고 다른 그래픽노블 작품을 먼저 읽었다무시무시할 만큼 무겁고 복잡하고 아픈 이야기였는데이 작품처럼 그림체 자체는 순둥순둥하고 선들이 부드러웠다마냥 인형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성격과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표현되는 듯한 그림들이었다방심하게 만들었다 스토리로 쾅쾅 때려주는스포일러가 될 것이 분명해서 뻔하지 않은멋진 결말은 언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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