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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1. 어떤 일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의 집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흘린 눈물 속에는 아주 복잡한 재료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아직 독립하기 전 기억 속의 집에 대한 디즈니 동화와도 같은 그리움, 책임도 고민도 불안도 대책도 필요 없었던 미성년 시절에 대한 유치한 동경, 안전한 울타리로 오랜 세월 기능하기 위해 집 전체를 돌보고 애쓴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 그리고 집을 집답게 유지하기 위해 기어코 집 자체가 되어버린 가족에게 얼마나 모욕적일지 몰라 마냥 떠나고 싶어 했던 경박한 욕망, 이런 것들도 들어 있다. 내가 충분히 안락하고 편안했던 시간들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을 거란 숙고는 얼른 도망치지 않기가 너무나 괴롭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엄마는 운전을 배우고 싶어 했고 같은 지역에 사는 친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웬만해선 며느리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처럼 편하다'는 관용구대로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 한다면
엄마에게 집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 26
언제나 혼자인 것과 항상 함께인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할까?
스무 살의 내 소원이 서울에 가는 일이었다면 스물여섯 살의 내가 바라는 것은 '자기만의 방'이었다.
자기만의 방은 독립과 해방의 공간이기 이전에 나의 눈물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권리였다. 54-55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
2. 재정 능력과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집
봄에 이사 가려고 둘러봤다 그만 둔 집들이 모두 2억 이상 매매가가 올랐다고 이런 미친 세상 포기! 라고 화를 내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는 곳living space을 사는 것buying item 카테고리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정치 자금 마련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초기 부동산 투기 정책부터,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라는 광고가 낮밤을 밝힐 때에도 이런 결말은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돈 안 되는 공공의료시설 따위 성가시기만 하다고 줄일 궁리나 하다 병상이 모자라다고 연일 보도하는 것처럼, 공공주택 역시 이제 와서 <대한민국공공주택 설계디자인공모> 따위를 떠들썩하게 해봐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이 책은 부동산 투자 성공법 - 이라 쓰고 투기 비법을 간절히 원한다 - 이 쓰인 책이 아니라 브랜드가 찍힌 매물들은 한 채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건물로서의 집은 구성원들의 재정 상황을 가릴 수 없이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고, 각자의 집이라도 구성원들이 생활공간을 어떻게 배당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가장 정치적인 셈법이 정답처럼 선명하기도 하다.
가장 생생한 증거는 아이들의 발화 - 어디 사니? 몇 평? - 와 TV 프로를 보면 잘 드러난다. 어느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위해 주방을 리모델링 해주고 어머니를 위해 서재를 리모델링한다고 할 때 익숙한지 어색한지 웃긴지 불편한지 잠깐 상상해보자.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공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130
"괜찮아, 집 전체가 다 내 방이지." 엄마의 뜻과 달리 그 말은 엄마의 처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며느리, 아내, 엄마인 여자는 집 안의 어느 곳에나 있어야 하므로 집 안의 어느 곳도 소유해서는 안 되었다. 엄마는 장소 그 자체였다. 141
3. 거부하거나 잃어버린 것들로 기억되는 집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을 읽는 도중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 감정과 반응이 여러 장르의 책을 읽는 것처럼 휙휙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작가가 가장 친밀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를 쓰다듬듯이 읽으며 기억 속 내 집들을 불러다 온갖 감정을 맛보기도 하다가, 대한민국 주거공간의 역사, 라는 부제의 사회 과학책인 양 읽으며 여러 통계와 기사들을 떠올려 보다가, 가장 인문학적인 사상서인 것처럼 논리에 집중하며 머릿속으로 온갖 논쟁을 나열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아마도 ‘집’이라는 공간이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이고 중첩적으로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면서 언제나 정책의 대상이면서 또한 갖가지 부조리와 범죄와 환원적 이유가 배양되는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자가 친절히 언급해주고 내가 기억하지 못한 말처럼 ‘집’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그 집에 살았던 ‘시절’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작가가 살아내고 기억해낸 시절의 최초의 집부터 현재 머물고 있는 시절의 집까지 작가 개인의 인생, 사회의 변화 그리고 시대정신의 변화를 혼란스럽도록 따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 시절은 지났는데도 머릿속에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반갑지 않은 집도, 아무리 그리워도 구조 변경과 함께 모든 남은 것들조차 영원히 사라져버린 분들도 떠올랐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 관악구, 구로구, 동작구, 영등포구, 금천구와 경기도 군포시, 광명시 일대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이라 불렸다.
어느 언론은 당시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제목을 따와
「충격, 경악, 서울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헤드라인을 내보냈다.
또 다른 언론은 범행이 주로 비 오는 목요일 밤에 일어났다며
「비 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들에게 여성들의 죽음은 자극적인 흥행물이거나 진부한 도시 괴담이었으나
나에게는 현실이었다. 나는 연쇄살인범이 여성들을 해치는 동네에 혼자 살고 있었다. 62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중략.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175
4. 아직 도착하지 못한 친애하는 나의 집은 어디인가
어디에서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미련할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와 짝을 지어 끊임없이 결정을 요구했다. 내 신경증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이 질문이다. 아무도 대신 답해줄 수 없어 오로지 혼자서 답해야 하는 질문. 자꾸만 의료진이 공무원이 정부가 다른 나라들까지 ‘집에 머물라, 생사가 거기에 달렸다, 너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의 생사까지 좌우된다’고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근무도 집에서 하라’는 시절이니, 적어도 내 짧은 생에서는 유례없이 ‘집’에 대한 개념과 태도를 정리할 필요가 매일 더 확실해진다.
이 책의 어디쯤에서 이전 월세 세입자는 마구 비웃었지만, 나는 작가가 아등바등하며 자신의 공간을 바꾸고 꾸미려고 하는 장면들이 정말 좋았다. 그런 시도와 노력이야말로 무심한 공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기서 살 나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상상하고 원하고 꿈꾸는 일을 했을 테지, 라고 짐작해 보는 일이 정말 좋았다.
우주에서 단 한 곳,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 그런 자기만의 방과 집은 - 감히 말하건대 -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는 판자촌과 노숙에 해당하는 가난을 모른다, 너무 무서워서 모르고 싶다, 단지 내 불안증이 활발하게 증폭될 때면 지킬 것도 별로 없는 삶에 뭔가를 더 잃을까 싶어 신경이 짓눌리고 실제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불안증 안에 머물 때 내가 잃게 되는 것에는 가족들도 포함이 된다. 이전에 잃어버린 - 잃었다고 기억된 - 가족을 떠올리고는, 이별이란 사진 속에 함께 했던 딱 그 시간까지만 삶이 존재했고 이후는 정지시키는 것이란 무시무시한 생각을 한다. 남은 표정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고인의 흔적을 남김없이 치워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오래 전 살던 동네 근처를 갈 일이 있어 기억 속의 공간에 들러보았다. 어쩌다 주택지가 관광지처럼 보일 때까지 다듬어졌는지, 내가 알던 시절을 모두 상실한 기분이 아니라, 애초에 잘못 찾아왔나해서 기억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다시 불려갈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만 꿈속에 소환하는 악몽의 배경이 되는 장소도 이젠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일 지 모른다. 그러니 시도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지금의 공간을 스스로에게 좀 더 친절한 곳으로 바꾸는 일일 지 모른다. 이런 기특한 생각은 [2021년 작심삼일을 반복할 목록들]에 넣어 둬도 좋겠다 싶지만...... 워낙 게으르니 하루도 못가 집어 치우고 머물고 싶은 미래의 공간만 자꾸 상상해 보고 있을 가능성이 더 그럴 듯하다.
조금씩 읽고 오래 울기도 했다.
경애한다고 말하며 그의 글들을 스토킹 하듯 찾아 읽는 정희진씨는 역시 진실만을 말하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