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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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친구들이 흥분하여 권해 준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이제까지의 인생을 그러모아 백번의 퇴고를 한 뒤 완성했습니다.” 이런 작가의 말이 들리는 듯 빈틈없는 멋진 작품이었다단박에 지루한 일상이 날아가겠다 싶게 충실한 무게감에 비례하는 쾌감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미스터리 추리 작품이라 감탄과 감사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여러 해 그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다가내가 알던 히데오의 작품 느낌과는 다를 거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친구의 권유로 <그림자밟기>를 뒤늦게 만났다호흡이 짧은 단편 소설집인 듯동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물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 모든 에피소드들의 말미에 주인공은 마침내 멈춰 쉬며 자신만의 진실을 마주하는 구성이다.

 

정확한 분류 기준은 모르지만 <64>가 사회파’ 장르의 작품들 중에서도 사회 조직 사회에 순기능을 수행하는 경찰과 제도권 -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해부하듯 거대한 작업을 하는 느낌의 구성이었다면, <그림자밟기>는 대반전과 대척점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전혀 다른 구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특이한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익숙하지도 않고 호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의로운 추리 천재나 영웅도 아닌수없이 시행착오를 겪고 끈질기게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캐릭터이다나는 사생활을 모두 드러내고도 자신만만한 끝없이 성장하는 이 주인공이 초능력을 가진 인물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신비롭게 보였다.

 

스스로 도둑이 된 주인공사회의 어두운 장소들에서 배양되는 부조리와 모순들동일한 물체의 양면일 지도 모를 이 두 세계를 모두 살핀다는 점이 저자 요코야마 히데오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온전히 보여주는 점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작품 내내 의혹과 푸대접을 받고마지막까지 휴식을 허락하지 않고 번민에 빠지는 애처로운 인물이라니…… 어쩌면 <그림자밟기>란 작품 자체가 그의 다른 작품들의 그림자인지도 모르겠다다른 소설들에서와는 판이하게 이 소설에서 경찰 조직은 야쿠자 조직의 복제처럼 꼭 닮아있다.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조직 사회에 속하지도 못하고 가족들도 모두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 주인공 마카베의 처지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존재하는 인물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쌍둥이 동생이다다시 생각해도 최고로 흥미롭고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설정이다꼭 닮은 자신과 다름없는 존재가 서로의 그림자였을까……그러니 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남은 존재의 그림자를 짙게 했을까…….

 

쌍둥이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중략.

생김새는 물론 자신과 마음속까지 똑같은복사판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주했다차라리 사라져버려그렇게 빌었다소원은 이루어졌다.

 

혼자가 되었다는 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으며 드는 궁금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상을 달리했다처음에는 마카베의 그림자가 무엇인지에 집중해서 속 시원히 밝히고 이해하고 싶었다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 그림자란 무엇일까 의문이 든다그리고 모두가 모여 사는 사회의국가의인류의지구의 그림자란 무엇일까’ 질문은 끝없이 연장된다칼 융 심리학을 처음 들었을 때공교롭게도 수업의 제목이 [지구의 그림자 The Shadows of the Earth}였다당시에는 나 자신의 그림자에 묶여 허우적대느라 지구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아쉽다지금도 별다른 성장을 한건 아닌 듯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도시의 풍경 속에는 도둑이기에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도둑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양지바른 길을 걷는 이들은 어쩌면 평생 경험해 볼 수 없을 지도 모를 인생의 이면.

 

어쨌든 요코야마 히데오가 말하는 그림자란 어둡고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절망적이고 불운한 것들의 총합이 아니다(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림자는 의외로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지지대이자 필요불가결한 공간이다그러니 빛과 그림자 사이를 지나치게 큰 간격으로 오가거나늘 밝고 명랑한 이들은 오히려 존재의 한 축이 상하거나 무너져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일 수 있다유아적이고 단선적인 사고방식이 현실 세계 경험 없이 주입된 사고방식이었다면주인공 마카베처럼 현실의 보이지 않은 사각들을 오래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온전히 구성할 수 있는 그런 삶의 방식도 있는 것이다.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내면…… 그림자란 내면의 무의식자아를 억압하는 미성숙한 영역이지만 그 역시 끌어안아야 할 자신의 모습…… 은폐해 왔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마침내 진실을 찾는다.


차갑고 비정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읽으며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거린다뭉클하거나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대신 우울해지지 않았다이 희귀한 스타일의 작품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역량과 필력이 대단하다는 말로 그 이유를 돌리고 싶다.

 

모든 것의 끝에서 마카베가 다시 본 그림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어떤 표정이었을까,

혹은 어떤 말을 걸었을까.

 

자신의 그림자를 영원히 밟을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그림자밟기>란 진실로 무엇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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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밟기>라는 연작은 단편 하나하나의 줄거리는 오히려 따로 떼어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단편 각각의 결말이 있지만 최종적인 결말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고이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인물들을 잘 파악하고 기억해야 퍼즐이 딱 맞춰지듯 깔끔하고 유쾌하게 이야기 조각들이 완성된다서른 명 가까이 나온다이름과 직업은 따로 메모하는 편이 완독을 돕는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반전들은 초반에는 흥미진진하게 가독성과 몰입도를 높이지만너무 많다 싶은 생각이 들어 지칠 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반전 예측에 훌륭하게 적응되어 있어 뜻밖에 결말이 예상 가능한 범위로 스르륵 떠오르게 된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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