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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대한 인간의 예의 -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소영 지음 / 뜨인돌 / 2020년 12월
평점 :
1. 태어나보니 반려동물과 함께였다. 배냇저고리를 입은 사진부터 많은 장면들에 함께 찍혔다. 5살에 내 멋대로 개명도 시켰다 한다. 다행히 우리 가족과 나의 첫 반려견은 바뀐 이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라 예뻐하기보단 귀찮게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둘이 찰싹 붙여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사랑했음이 분명하다.
나의 첫 반려동물이자 가족은 어느 밤 내 방에서 함께 자고 깨어나지 않았다. 새벽에 잠깐 잠에서 깨니 고개를 들고 무언가 쳐다보고 있기에 자자, 한 마디 하고 다시 잠들었다.
그 후 부모님께는 새로운 반려견이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시간과 애정을 나누며 관계를 만들어 나가지 않았다. 한참 후에도 이동이 잦으니까, 혼자니까, 누군가를 돌 볼 마음이 없으니까, 자꾸만 이유를 만들어서 반려동물과 삶을 나누지 않았다.
사랑하는 존재가 빛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나에게 커다란 숙제를 안겨주는 것 같았다.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이란 반려동물이 죽고 난 뒤에 겪는 상실감, 슬픔, 고통, 우울증 등의 정신적 어려움을 의미한다. 중략. 이를 ‘인정받지 못한 슬픔(disenfranchised grief)’이라고 설명한 심리학자 밀리 코다로는 반려동물을 잃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규범적인 슬픔의 과정(normative grief process)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것과 같은 강도의 외상 후 장애를 겪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공감과 인정이 부족한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조용한 슬픔’을 맞이하게 되고, 그럴수록 그들이 받은 심리적 상처를 회복하기 어렵다.
2. 당시 내가 시대정신이라 굳게 믿었던 주제, 환경/생태학/생태철학을 전공하면서 피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분야가 있었다. 동물권에 관한 숙고와 고찰, 윤리와 철학, 정치적 주체 대행의 문제, 법령 등등. 우리는 그저 인간 아닌 ‘동물’이라고 이분하지만, 동물이라는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처해 있는 상황은 인간 세계 못지않게 복잡다양하다. 크게 야생동물과 축산가축을 대하는 인간의 관점과 태도와 법령을 생각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문제는 언제나 이 동물들의 생존과 얽힌 인간의 이익구조이다. 알다시피 ‘돈’되는 일과 싸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히는 일이고, 실제로 멸종동물을 보호하려했던 동물학자들은 밀렵을 통해 거래하는 이들에 의해 살해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축산업 쪽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적 추세는 점점 더 소규모 축산을 대자본이 흡수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런 거대 자본이 투자하는 사업에 철학, 윤리, 정치, 법령은 바위에 묻지도 않는 계란일 경우가 부지기수다.
‘경제적 편의’와 ‘동물의 복지’라 는 가치를 두고 선택을 해야만 할 때, 나는 두 번 고민할 필 요도 없이 ‘동물 복지’를 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의 유혹을 이겨낸 후, 나는 이직을 할 때까지 다른 것을 포기하더라도 동물 복지 상품을 소비하거나 차라리 소비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내가 가진 특권이었다.
‘생명을 존중하는 일’은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며 그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고, 농장 동물들의 짧은 생이 작은 틀 안에 갇혀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도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생명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 해서는 개인의 자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동물보호법」 이 정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사람들 을 위해 국가 재정으로 ‘동물 보건소’를 운영하는 것은 어떨 까. 기본적인 접종이나 진료의 혜택을 주는 것만으로도 큰 질병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 복지 축산 농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소비자들이 이왕이면 동물 복지 제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 또한 개개인의 의지에 기댈 일이 아닌 제도적인 차원의 노력이 필요 한 일이다.
3. 어느 날 수업 중에 ‘살아 있는 돼지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냐’고 교수가 질문을 했다. 나는 당연히 여러 명 있을 거란 생각에 맘 편히 손을 들었는데,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딱 혼자였다. 그 당혹감이라니…… 다들 농가의 자손들이었던가요……. 그런 이유로 나는 돼지를 육류로 가공하기 위한 농장을 운영하지만 영국에서 가장 돼지의 복지를 염려한다는, 적어도 살아 있을 동안에는 최대한 고통을 덜 느끼도록 한다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농장에 견학을 가게 되었다. 진심 실화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에서 내려 방역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처음 견학한 가축농장이 그곳이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고 엄청난 보호를 받은 경험이었다. 그곳 돼지들은 각자의 성격 발산을 자유롭게 하며 널찍한 공간에서 뛰어다니며 상당히 멋대로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기 돼지들의 호기심과 비례하는 호들갑, 청소년 돼지들의 왁자지껄함과 건방짐 - 실제로 옆에 와서 기록하는 나를 밀어서 넘어뜨리기도 하는 심술을 부렸다, (임)산모 돼지들의 예민함과 청결함 - 방역복과 마스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등등.
그곳은 농장주 가족들의 자랑스러워하는 얼굴 표정에 걸맞은 돼지 세계의 히피해피 공동체 같은 곳이었다. 마냥 사랑하기 때문에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가능한 고통을 줄이도록 하는 노력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동물들을 식재료로 사용하는 것, 화장품과 의약품의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납치 감금 실험 고문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마구잡이식의 생각과 태도와 관행과 무법천지여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런 의문은 들지 않나, 직접 그런 불편한 질문을 해본적은 없지만 나는 요즘도 가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들도 생산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장품과 헤어관련제품들의 안전성 실험을 할 때는 눈물양이 적고 눈 깜빡거림도 거의 없는 토끼를 드레이즈 실험에 자주 사용했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 역시 영상에서 수개월간 마스카라가 3천 번 발려지거나 화학물질이 주입되어 피를 흘리거나 눈이 머는 과정에서 한 토끼가 옆의 토끼 눈을 계속 핥아 주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까지 해서 만든 완제품으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4. 여전히 반려동물과 함께 하지 않으리란 내 결심은 올 해도 변하지 않았다. ‘예뻐’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제 자식을 목숨을 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면서도 입신양명을 위해 못할 짓들을 하고, 바로 그 세상 귀한 자식들이 살아갈 사회도 생태계도 망가뜨린다. 동물 쇼를 보고 재주를 부리는 동물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지만 그 박수와 환호는 그 동물의 행복과 복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내가 사는 세상의 규칙을 온전히 배우지 못하는 생명체를 온전히 나의 의지로 집에 데려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한없이 양보하고, 배우며,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오직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명을 책임지는 보호자의 ‘최소한의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해진다. 내가 데려온 동물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만 나는 그들이 행복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어떠한 생명이든 집에 들이지도, 키우지도 말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비극은 보호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호하겠다고 자처하거나, 책임과 의무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무작정 다른 생명을 끌어안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4. 작년에 꼬리를 잘리고 학대당하던 어린 고양이가 구출되었는데, 정말 뜻밖에도 부모님이 입양을 하셨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던 분들이 아니라서 자식들은 한동안 고양이 걱정을 했다. 워낙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그저 건강하게만 살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개냥이로 변신을 해서 부모님께 애교 많은 막내 노릇을 하고 있다. 작은 몸이 가진 온기가 얼마나 큰지 주변 인간들의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봐야 모두에게 집을 구해주지도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을 마련해주지도 못하지만, 길냥이들이 어디서 깨끗한 물을 구할까 매일 걱정이 된다.
이 책을 읽다가 예전에 너무 끔찍해서 얼른 잊어버린 ‘나비탕 사건’이 지금에서야 더 각별한 느낌으로 복원되었다. 더불어 바퀴벌레를 박멸시키고 싶다면 한국인들에게 바퀴벌레가 정력에 좋다고 알리면 된다, 라던 모욕적이고 충격적인 멘트도 생각났다. 한국인들이 정력 속설에 따라 까마귀를 잡아먹는다는 보도가 퍼진 직후였다.
몸이 유연한 고양이를 먹으면 골다공증이 낫고, 거북이 등에 글씨를 새겨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여러 암컷을 거느리는 물개의 생식기를 먹으면 정력이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기린을 먹으면 목이 길어지고 코끼리를 먹으면 코가 길어진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을 칠까 아니면 진지하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까.
근거 없는 믿음이 다른 생명을 무고한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누군가의 고통을 방관하는 일로 이어진다면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야만성을 지우지는 못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몇몇 국가의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이며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5. 100분의 도 소개하지 못하면서 길기만 글 속에서 나는 중언부언하였지만, 이 좋은 책에서 저자는 친절하고 깔끔하게 여러 대답을 들려준다. 옳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문을 가져야 하는지, 동물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일이 왜 인간답게 사는 일인지, 개개인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선의에만 의지하는 일의 위험과 한계가 무엇인지, 그러니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 동물과 인간이 함께 행복하려면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 세상의 변화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비록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더라도 좋은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답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 앞에서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을 다잡아본다.
-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불합리함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정책이 되어 안착할 수 있으려면, 시민들 개개인이 조금 더 움직여야 한다. 모두가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법을 만들어야 할 국회의원들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요구를 대신하여 정책을 만들어주는 이들이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 힘을 실어주고, 어디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지에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한다.
자고 나면 참 추워진다고 한다.
다들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길고 길 겨울에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셨으면 좋겠다.
특히나……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망가뜨린 대가를 코로나 판데믹으로 치르는 이 시절에,
거대한 육가공산업과 육식습관을 부흥시킨 결과 기후재앙에 이른 이 시절에,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뉴노멀을 준비해야하는 이 시절에,
스스로 진화하여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읽으시고 이야기 나누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