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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시간 기록자들
정재혁 지음 / 꼼지락 / 2020년 11월
평점 :
어제는 흘러가지만 기억은 남고, 그렇게 느린 시간 속에 어제는 가끔 내일이 되어 흐른다.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지는 곳들을 좋아한다. 오래 전 베네치아에 워크숍하러 갔다가 우연히 산책길에 발견한, 장인들이 무두질로 만드는 가죽 노트를 보고 홀린 듯 주문을 넣었다. 덕분에 모든 일정이 끝나고도 나는 오로지 그 물건을 받기 위해 혼자 며칠 더 머물렀다.
한국에서 내가 고집스럽게 좋아하는 장소들에는 몇 년 사이 백년가게나 오래가게란 새로운 별칭이 붙은 곳들도 있다. 나 스스로 생산하거나 창조하는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도움 받으러 가기 보단, 주로 소비하고 마는 상품들을 취급하는 곳들이지만, 내 선택과는 별개로 그런 장소들은 단순히 오래 살아남았다, 는 것 이상의 서비스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저 스쳐 가는 순간이고 금방 잊어버릴지 모를 추억이지만, 그곳에 담겨 있는 정서를 기억한다.
두 해 전인가, 독일에 사는 독일인 친구가 영주 호미 얘기를 하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농기구인데, 이미 정원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했다. 아마존 직구도 가능하지만, 그토록 찬탄하니 기쁘게 선물로 보내 주며 신기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인류가 정말 새로운 방식으로 전 세계를 연결했나보다, 정보 공유의 범위가 확대되자 고유한, 로컬, 전통, 내재적 가치를 가진 기술과 장인과 상품과 상점이 글로벌한 평가를 받고 선택되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도 도쿄의 오래된 장소들인가 보다, 했다가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 이렇게 명백히 써놓았는데도 그런 시각판단오류를 범하다니…… 방향이 굳어진 사고방식이란! 이 책은, 저자는 장소가 아니라, 혹은 장소를 포함하여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사람들에 관한 에세이이다.
불매에, 반일에, 혐한에, 코로나로 언제쯤이 되어서야 참 좋은 이들이 맘 편하게 그리운 이들을 서로 반갑게 방문하게 될지 모르는 일본의 도쿄, 저자는 젊은 장인들을 어떻게 만나 대화하고 취재하고 책을 함께 만들었을까, 궁금하고 부러운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 보았다.
89년 생 장인?!
개념이든 사상이든 무엇이든 적절한 업데이트가 없으면 낡고 만다. 언어란 사전에 등록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맞춰 태어나고 변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장인’이란 단어는 내게서 그런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었던 지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완전히 새로 배우고 정의를 익혔다.
(구) 장인: 오래 되고 고풍스럽고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가업을 수행하는 성실하고 고집스러운 책임자로서, 고유한 가업을 외부로부터 보호, 유지, 전수하고 그 과정은 대개 엄격한 도제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신) 장인: 젊고 아이디어가 샘솟고 연구를 즐기고 일을 사랑하고 열정적인 이들로서 창업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평생 자기만의 ‘일’을 찾아 하는 이들. 오래된 전통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새로운 기술도 자신만의 개성도 모두 쏟아 부어 새로운 전문성을 갖추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총 14명의 장인들이 소개되는데, 이들도 - 당연한 일이지만 - 조금씩 결이 다르다. 이들 중 몇 분은 일본의 전통을 정통적으로 이어가는 일에 노력을 하며 현대적인 감성을 세련되게 입힌 분위기가 더 강하다. 한편 또 다른 분들은 전통과는 별개인 - 신경을 쓰지 않았다, 라기 보다는 - 서프라이즈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나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특별한 장점이 이 점에 있다고 본다.
게으른 편이기도 하지만 정보 수용이나 의사소통을 꺼리는 편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세계는, 도쿄는, 사람들은 내 예상보다도 더 분주하게 변화하고 있다. 내가 움츠리고 있는 동안에도 하루하루, 매일매일 그저 도전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나이 탓을 하며 안 하고 싶은 일을 안 하는 재미를 점점 늘려 가는 중에, 젊은 장인들의 모습과 이야기에 뭉클한 감동도 반성도 느낀다.
매일 내가 만들어 가는 현실 이외에는 다른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만들어가는 대답 이외의 정답은 없다는 것을, 지치고 지겹지만 다시 기억하자고 조금 힘을 내어 본다. 그래서 어느 날 살면서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여성 스시 장인 - 나데스코 스시 - 이 만들어 주는 맛있는 식사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경험하고 싶다.
세상은 너무 쉽게 2대, 3대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오늘이란 이름의 하루와 하루가 쌓여야 만들어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