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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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일들 온갖 종류의 -을 서둘러 잊지 않고 오히려 잊지 않도록 끝끝내 붙들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일까단지 강한 사람이다용기 있는 사람이다특별한 동력이 있을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는 얄팍하고 부족하다더구나 그런 일들을 혼자만의 상처로 싸안지 않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바꾸는 일은 어떻게 시작하고 지속하는 것일까처음에는 머뭇거렸을 지라도 몇 번이고 다시 말하고 기록하여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그려나가는 일일 것이다잊지 말고 기억해서 반드시 써야 한다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으로 600쪽이 넘는 두께보다 묵직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가끔은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은 읽고 싶지 않아 외면할 때가 있다그러다 읽으면 우울해지는 글을 그럼 왜 썼을까기분 좋게 썼을 리 만무한데……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진다무감해지지 않으려면 무례해지지 않으려면 함께 잘 살고 있는지 계속 물어봐야하기 때문이다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리게 계속 말해야하기 때문이다차별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고거의 언제나 차별이 아니라고 하는 쪽이 더 말이 많다논거도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거나 망상에 근거한 폭언이 쏟아지거나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차별하기도 한다.

 

젊은 여성들이 사고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선택을 즐기며 살아나가길 권한다.

자신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해나갔으면 한다.

이이효재


어린 시절에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대한민국의 '정상성'에 적합한 이들로만 구성된 환경에서 자라나서 다른 생각을 해 볼 여지가 없었다그렇다고 주위 분들이 혐오할 대상들을 특정해서 의식화시키는 이들은 아니었지만내 일상에서 만나지 못하고 이야기 나눠본 적 없는 삶에 대한 면역도 상상력도 참 많이 부족했다반추해보면 온갖 토론과 논쟁이 가득하던 대학시절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나눌 기회는 없었고 기억하는 한 공론화된 분위기도 전무했다(혹은 순전히 내가 몰랐던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제는 LGBTQIA+Black lives matter!라고 한다지요.

 

그러다 영국유학을 갔더니 배당된 담당 의사는 Lesbian, 도서관서기는 Cross dresser, 동기들 중 Gay, Bisexual, Asexual 등 다양한 성적 취향들이 존재하고 공존했다그렇다고 충격을 받거나 혐오하는 감정이 생기진 않았고한국에서의 오리엔테이션 경험과 달리국적인종성적지향성외모계급재산 등등에 따라 타인을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행사하는 경우퇴학을 당하거나 추방되거나 체포될 수 있다는 엄청나게 진지한 교육을 받는 점이 인상적이었다처음으로 내가 적극적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고 조심스러웠던 순간이었다.

 

늘 긴장하며 살지는 않았지만분명한 철학과 정책 방향성을 가진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학습되어 체화되는 중요한 가치들과 감성들이 있다그런 면에서 나는 전공공부만이 아니라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 다소 게으르게 운 좋게 - 차별과 혐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덤으로 받은 것이다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개인을 비난하고 개인의 노력만을 요구하는 대안에 대해서는 아직도 신뢰하지 않는다간혹 그런 시도는 정확한 비난의 대상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야비한 의도가 개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인간이 타고난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서로의 수행과 연기에 의해 주어지는 것

김현경(인류학자)

 

어쨌든편견과 거부감이 뚜렷하지 않아서혹은 타인의 취향에 원체 별 관심이 없는 게으른 성격 탓에 불편하거나 불쾌한 경험 없이 잘 지냈다때가 되면 의례히 대성당 앞에서 LGBT(2000년 당시축제나 퍼레이드 모임도 있었고화를 내며 뛰어나와 저지하거나 욕설하는 이들을 목격한 적도 없었다오히려 좀 더 나이가 들어 돌아 온 한국 사회에서 재적응해 살면서소위 커밍아웃을 하거나 아웃팅을 당한 이들이 참으로 지난하고 고단한 폭력의 세월을 견디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원하는 사회상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나는 원체 거대한 꿈을 갖는 일조차 번거롭게 생각하는 대책 없이 게으른 성격이라언제나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보다(for), 불편하고 견디기 힘든 것들이 사라지는 자잘한 소망들을 가지고 산다(from). 그러니 당연히 폭력차별억압혐오 등의 범죄들이 하루 빨리 사라지길 바라고마땅한 법률제도사회문화 등등 모든 형태로 금지처벌지양되길 바란다.

 

그래서 특정한 계급인종국적성별의 소수 주인공들의 지배 구조가 현실이든 문학이든 별반 달갑지 않다모두가 주인공인 그런 세상이 현실이면 제일 좋겠고 가끔은 그런 문학도 만나고 싶다이 책은 뜻밖에 내 기대보다 더 많은 열두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그런 구성이 뭉클하고 반갑다.



(sex, gendre)과 관련된 구분과 위계사회통념이 가하는 무겁고 오래된 억압갑갑하다고 느끼는 굴레들을 벗어나 관계 속의 나’ 말고 나 자신을 찾아내려는 노력소외되고 차별받지만 다 견디고 잘 살아간다는 강하고 단단한 삶유지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가족의 의미비동시성의 동시성그 혼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여러 고정관념들그 이외에 여러 내용들이 장대하고 유려한 서사로 깊은 강처럼 흐른다.

 

그런데 문장들은 경쾌한 운문 형태로 졸졸 흘러간다마침표가 잘 보이지 않는다그러다보면 아주 유창한 연설을 듣는 것인지누군가 암송해주는 시를 듣는 것인지 경계가 무뎌지기도 한다때로는 작가가 아주 긴 호흡으로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잘 따라 와보라고 말을 거는 듯도 하다그리고 작고 큰유쾌하고 진한 감동들이 반복된다. (이 파격적인 스타일을 에바리스토는 퓨전 픽션Fusion Fiction’이라 명명했는데문장의 시작과 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얻은 덕분에 각 인물의 머릿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난 희생자가 아니야,

절대 나를 희생자로 대하지마,

우리 엄만 날 희생자로 키우지 않았어. 91

 

이곳에 출근한 첫날부터 분명했던 건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 변호사나 정치가나 탐정처럼

차려입고 출근해야 한다는 것

근무 시간 내내 몸에 꼭 끼는 치마를 입고

아찔할 정도로 불안불안한 하이힐로 두 발을 꽁꽁 얽어 맨,

기적에 가까운 모습으로 일하는 여자들

상류층 대상 스트리퍼들이 신는 하이힐 속에

근육이 짓눌리고 뼈가 뒤틀리도록 발을 구겨 넣어야

잘 드러나는 성욕 자극 부위

그녀의 교육과 재능과 지성과 역량과

리더십 잠재력을 나타내기 위해

몸에 손상을 주어야 한다면,

좋다그래야지 200-201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라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어떤 침묵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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