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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연습 ㅣ 책 먹는 고래 12
정영숙 지음, 윤지경 그림 / 고래책빵 / 2020년 10월
평점 :
꼬맹이였을 땐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도 모두 멋진 어른으로 보였다. 철부지들이 가득한 어린 우리들 세상의 온갖 돌발과 억지와 부조리함이 다 극복된 합리적이고 지혜롭고 현명하고 선의로 가득한 그런 세상이 어른들이 사는 세상이라 믿었다. 그래서 어른들 말씀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중, 고등학생이 되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어른들과 세상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역시 예외들이고 문젯거리들일 뿐이라고, 이데아처럼 존재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그런 기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늘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피할 곳도 숨을 곳도 부정할 수도 없는 어른 모양으로 늙어가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받을만한 능력이 있고 필요한 이들에게 믿음직한 의지처가 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현명한 해답들을 알고 있는 그런 존재는 되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건 내 문제일 수 있으니까, 세상은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된 이들로 가득할거라고 절망에 빠지진 않았는데, 어느새 내게는 세상의 온갖 문제를 유발하는, 혹은 세상의 문제거리 자체로 존재하는 (나를 포함한)어른들의 모습만이 보인다. 아이들과 어른들 중에 어른들이 잘못한 일들이 더 많을 것은 자명한데, 누가 누굴 교육한다는 것인지.
그러니 아이들을 철부지라 부르는 건, 아이들의 희로애락을 진지하게 생각해주지 않는 건, 우연히 만난 곤충과 동물과 상상 속 존재들과 금방 친구가 되는 일을 응원해주지 않는 건 이해도 상상력도 부족한 죄 많은 못난 어른들이 하는 짓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화읽기는 자주 아이들보다 어른인 내게 더 좋다.
더구나 오랜 기간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경험을 지닌 정영숙 작가의 동물과 도깨비와 생명을 얻은 사물들이 등장하는 아이들의 세계는 갈수만 있다면 가보고 싶은 엉뚱하고 재밌고 무해하고 즐겁고 모험으로 신나는, 그리고 한 때 우리가 가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꿈과 우정이 어여쁘게 담긴 곳이다.
손흥민 선수처럼 등번호 7번을 달고 멋지게 슛을 넣는 선수가 꿈이지만 현실에서는 매일 힘들게 기초연습만 해야 하는, 그래도 안 가겠다 안 하겠단 소리 한번 없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틋한 우리 집 꼬맹이가 읽었으면 제일 좋겠단 생각이 들어 슬쩍 권했다. 다행히 영웅이도 도깨비도 동물들도 흥미로운지 조용히 몰입해서 끝까지 읽는다. 읽으며 무슨 상상을 할까,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 아이들이 생각하는 용기, 우정, 사랑, 지혜는 무엇일까…… 궁금한 점들이 옆에 앉은 내 맘 속에 쌓여간다.
부디 무엇이든 제일 잘 하고 싶어 하는 욕망보다, 즐겁고 기분 좋고 행복한 시간이라고 기억하는 일들이 많기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마음이 부대끼고 아픈 경험이 없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전의 지금의 기성세대들,위 어른들처럼 세상을 열심히 망치지 말고, 더 어려운 일들이 닥칠 것이 분명한 그 세상을 바꿀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 교육을 많이 받은 인간들, 수재들, 일등들이 저지른 온갖 범죄들이 역사에 가득하니 자신들만의 꼴찌연습을 통해, 이익을 좇아 세상을 해치지 말고 좀 더 살기 쉽고 다 같이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에 기여할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
<꼴찌연습>을 읽고 문득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책장에서 처음 만난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떠올랐다. 작가의 친필인 듯 잉크가 군데군데 번져있는, 거친 갱지와 같이 종이 먼지가 파사삭 날 듯 한 이 책을 백만 년 만에 펼쳐 보니, 1977년 당시 15세였던 외동아들에게 선물하며 "간직하거라. 엄마가"라고 한 작가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장르도 내용도 다르지만 뜻밖에 어머니와 내 시대의 추억이 간직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와 2020년 <꼴찌연습>을 교차하며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