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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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이후 지식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결국 지식은 그가 상상한 대로 자연을 장악하고 소유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장악하고 소유했다는 환상만 초래했을 뿐이다.

결국우리는 자발적으로 지식이라는 병을 얻었다.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과 나란히 존재하는 그러나 형태가 잡히지 않고 이름이 없는 다른 삶,이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읽기 전부터 저자의 상상력이 상상 이상으로 자유로워야함은 물론 독자 또한 그 상상력의 갈피를 잘 잡고 따라가야 할 듯 긴강이 된다. 다행히 숨을 멈추고 읽는 긴장을 느슨하게 해주는 유머어두운 유머가 등장할 때마다 쉼터를 만난 듯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정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이제 없나싶게 신기한 것들이 모두 소멸하고 궁금한 것들도 다 시시해지는구나,하는 기운 빠지는 기분이 들 때에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유명한하지만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잠시 놀라고 오래 반갑다더구나 한 작품도 읽지 못한 작가인데 그 작가의 기량이 정점에 서 있다는 작품을 가장 먼저 만나는 일은 뭔가 운좋게 지름길로 들어선 것마냥 신이 난다.

 

친절하지 않아서 미스터리의 시작으로 곧장 들어가는 듯한 도입이 흥미롭다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들과 장면들을 꽤나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사는 장소만으로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구도사전정보 없이 읽는 이야기의 시작이 무척 재미있다아무도 방문한 적 없는 고적하고 낡은 공간에 살면서 친척에게는 상당한 돈을 후원하고 한밤중에 서성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아버지. 그 인물의 삶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라진 확실한 이유가 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수만큼이나 궁금하다.



실종이란 단어만큼 관심과 질문을 증폭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다르겠지만아버지의 실종 신고 이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나서고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그 나라의 시스템이 이런 구조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사건이 복잡하고 커질 것이란 기대는 확실해진다마지막 행선지가 교차로라니유적지와 자연 보호 구역 중간의 교차로단초를 제공하는 듯하면서도 행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장치이다텅 빈 서류가방 역시 같은 기능을 한다시신도 목격자도 보고도 없는 부재사라지기 전에 희미했던 존재가 부재로 인해 확실해지는 반전. 역시 재미있다.

 

이런 상황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더없이 적절한 마무리처럼 보였다엡스타인에게 죽음은 너무 하찮았다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제적인 가능성도 아니었다생전에 그는 공간을 꽉 채우는 사람이었다몸집이 컸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오롯이 담기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그의 존재는 너무 컸고 항상 넘쳐흘렀다모든 것이 쏟아져나왔다열정분노열의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전 인류에 대한 사랑그는 언쟁이라는 배양액 속에서 길러졌고 살아 있음을 알기 위해 언쟁이 필요했다그는 친해진 사람들의 사분의 삼과 사이가 틀어졌고남은 이들은 잘못이라고는 저지를 수 없는 사람들로서 영원히 엡스타인의 사랑을 받았다그를 안다는 것은 그에게 사정없이 뭉개지거나 터무니없이 부풀려지는 일이었다그의 묘사 속에 등장하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긴 줄을 이루었다엡스타인은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불어넣었고 그가 사랑하기로 택한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커지고 또 커졌다마침내 그들은 메이시스백화점의 퍼레이드 행사용 풍선 인형처럼 날아다녔다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날 엡스타인이 추구하는 윤리의 높은 가지에 걸려 펑 터지기도 했다그때부터 그들의 이름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부풀리는 습관이 있다는 면에서 그는 뼛속까지 미국적이었지만경계에 대한 존중 부족과 동족 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또다른 무엇이었고그 다른 무엇이 끊임없이 오해를 낳았다.

 

황혼 이혼을 하고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인물인가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선호도/불쾌도 분명하고 솔직하며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두는 자신만만한 인물이다자신의 호기심에 투자하고 조사하기 위해 떠난 것일까왜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을까.

 

엡스타인은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다정제되지는 않았어도그는 자신에게 있는 잡티를 모두 없애버리고 싶어하지 않았다반짝반짝 잘 닦인 사람이었다그는 쾌락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크고 진실한 쾌락을 느꼈고그래서 아무리 섬세한 것들 사이에서도 느긋하고 편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 대해바라는 바에 대해 정확히 알고 원하는 것은 노력해서 차지하고 세계관이 흔들림없이 확실하고 설득력도 강한 사람그러나 집착이 강하거나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잘 만나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인물처럼 느껴진다그렇다면 실종은 자발적으로 사라지겠다는 결정,이었을까.

 

하지만 마지막에는 표류라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나중에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고자 당시를 돌아보며 그에게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쾌락에 관심을 잃었을 때라고 특정할 수 있었다엡스타인과 그의 왕성한 욕구 사이에 무언가가 열렸다욕구는 한 남자가 내면화한 인식의 지평 너머로 물러갔다그때 그는 자신이 사들인 섬세한 아름다움과도 결별하고 살았다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융합할 능력이 부족했거나그렇게 하겠다는 야심이 시들해졌다중략그의 안에서 뭔가가 변했다엡스타인의 존재를 이루는 거센 기후가 더는 밖으로 휘몰아치지 않았다급격한 기상학적 사건들이 생기기 전에 그러하듯이사방에 거대하고 부자연스러운 고요가 내려앉았다그러더니 바람이 바뀌며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 순간 급작스런 내면의 변화를 겪는 이들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궁금한 지점은 그 계기가 된 것이다문화적 차이일까아버지가 자신이 이룬 재산을 기부하는 행동을 자식이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심정인지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따금 밤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사람들이 수백수천 년간 전해온 똑같은 동화와 성서 이야기와 신화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빼앗는다는아이들의 정신에 케케묵은 인과의 경로들을 그토록 일찍그토록 깊이 각인시킴으로써 세상을 이해할 무한한 가능성을 강탈한다는비뚤어진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밤이면 밤마다나는 아이들에게 관습을 가르치고 있었다제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도 그것은 언제나 관습이었다.

 

짧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이 마치 속구만 던지는 투수의 경기를 보는 듯하지만한 구 한 구가 묵직하다어떤 복잡한 미스터리 장치라도 소설이라면 인물의 행동에 모든 이유가 있어야 하고결국에는 마지막 구성 단계에서 그 동기가 드러나야 할 것이다설마 이 소설이 이를 모두 배반하는 무정형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 계속 읽는다장면들이 바뀌는 속도만큼 두서없고 무질서하고 흐릿한 모든 부분들이 더욱 섬세하게 처리될 과정이라고 믿는다그러다 카프카가 등장하면서 독자인 나를 위로하는 이 모든 생각과 믿음이 흐트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프카처럼 철저히 문턱에 머물러 산 사람도 없었다행복의 문턱저 너머로 가는 문턱가나안의 문턱우리에게만 열려 있는 입구의 문턱에서탈출의 문턱변신의 문턱에서거대하고 최종적인 이해의 문턱에서거대하고 최종적인 이해의 문턱에서그런 일을 카프카처럼 잘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런데도 카프카가 결코 불길하거나 허무주의적이지 않다면그것은 문턱까지 이르는 데도 희망에 대한 민감성과 강렬한 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문은 있다올라가거나 건너가는 길은 있다우리가 이 삶에서 거기에 도달하거나그 문을 알아보거나통과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할 뿐.

 

두려움과 불안과는 다르게 카프카의 등장 이후 가독성이 더 증가한다커튼을 아무리 밀어내도 여전히 어둑한 공간처럼 내 안의 어두운 숲을 향해 동시에 전력질주하는 기분이 든다숲이 끝나는 장면에서는 비가 쏟아질 것인지 빛이 쏟아질 것인지 모를 일이다한 번에 모두 다 쏟아 붓듯이 어느 한 페이지를 잘라 소개할 방법이 없다놀랍게도 카프카의 이야기가 이 혼돈과 어두운 숲길을 빠져나오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안내판이다이렇게 쓰고 보니이 말이 정확히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처럼 들린다길잡이가 된 카프카이렇게 모순되고 유쾌한 역할이라니.

 

번역의 힘을 빌려 읽은 책이지만유대인 문화역사종교갈등을 다루는 시대의식이 빼곡하고 짙으니 문학상 소식에 자주 오르내릴 작품이 되지 않을까하는 순전히 자의적인 예언을 덧붙인다.

 

왔던 방식 그대로 돌아가리라

오던 길을 되짚어서

이제는 어둠도 잠긴 사페드의 거리를 지나고

이제는 어두워진 산비탈을 내려가 어두운 계곡을 뚫고 어둡게 빛나는 바다를 따라

모든 것을 아까 전과 반대로

유한한 세상에서 사는 건 바로 그런 거니까

그렇지 않은가?

대립쌍들로 이루어진 삶?

행동하거나 돌이키고

여기이거나 여기가 아니고

있거나 있지 않고

평생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며 살아왔다

안 그런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몰아붙여 생생한 존재로 만들었다

인생의 정상에 서서 얼마나 자주 그렇게 느꼈던가?

...

충만한 인생

비존재에서 존재를 향해 그칠 줄 모르고 씨름한 인생

...

그 안의 세상이 너무도 완전해서 그는 모두지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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