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대학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무조건 일주일 휴식!이라고 결심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신간들을 대여하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처음으로 읽었다파브르의 곤충기 책이 분리되도록 재밌게 읽고 자랐으니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직접 관찰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아프리카로 가서 개미를 연구한 후 120번에 가까운 개작을 해서 1991년 탈고한 작품이라는 책 소개에 얼마나 설렜던지그 시간 이후로 운 좋게도 한국 독자들의 애정을 듬뿍 얻은 베르나르는 섭섭하지 않을 간격으로 계속 자기복제 없는 흥미진진한 책을 출간했고나는 매번 반갑고 기쁘게 열심히 읽었다.

 

그리도 2020년 신작 <기억>이 번역되었다.

 

초판 한정 [렌티큘러표지를 몹시 갖고 싶어 마치 굿즈가 탐나 책을 구매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더 궁금한 것은 역시 내용이라고 위로한다. - 늦을세라 구한 기억 1,2편이 드디어 도착했다책을 열어 보기 전 표지를 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본다보호필름도 떨어질세라 꼭꼭 눌러둔다하드커버도 오랜만이다새까만 표지에 번뜩이며 사라졌단 나타났다 변형 이미지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는 표지를 보고 있자니마치 표지의 피험자 뇌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을 헤집어 보는 섬뜩하고 서늘한 기분이 든다나비가 날개를 팔락이고 별이 반짝인다마치 최면단계에 들어가는 것만 같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누군가의 기억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기억을 보게 될 것이고 타인의 기억들에 장난과 조작을 가하는 이들을 보게 될 것이고 화가 나거나 어리둥절해지거나 인간이란 기억에 다름 아닌가하는 답 없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기억이 사라진 누군가는 이전의 그와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 것이고 기억을 잃어갈 지도 모르는 노년의 삶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할 것이다궁금한 만큼 아까워서 막 빨리 읽어 버리면 어쩌나 싶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외부의 힘에 휘둘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우리 뇌를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주물러 변형시키고 그 안에 거짓말을 주입하면 결국 그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까.

 

베르나르의 세계관과 문학관과 작품들이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들 중 하나는 언제나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개인의 기억 오류야 사안에 따라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일 경우도 많다내 나이 대 친구들은 벌써 가끔 함께 한 경험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해서 기어코 증거가 될 그 시점의 사진들을 가장 성격 급한 누군가가 꺼내들게 만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거짓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모든 것은 기억이다집중력을 잃으면 안 돼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자이건 생존의 문제야기억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현재에도앞으로도.

 

문제는 '기록'이 될 집단적 '기억'에 관한 것들이다잊지 않겠습니다기억하겠습니다는 의례적 발언이여서는 안 된다잊어버리라고기억하지 말라고 간절히 원하고 가능한 교묘히 조작하고 흙칠똥칠을 해서 얻어 낸 망각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집단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잊지 않으면, 끈질기에 기억하면 결국엔 진실을 밝혀 낼 수 있다기억하기만 하면그런 문제들이 파일더미를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에 사는 지라 베르나르가 역사적 기록에까지 기억을 확장시키는 내용이 반갑고 고마웠다.

 

용서가 망각으로 이어져선 안 돼요바로 이 지점이 역사에 요구되는 역할입니다죄를 묻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게 역사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뜻이예요.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 지성의 영역을 벗어나 감각의 영역으로 들어가요과거는 후회의 원천이고 미래는 두려움의 원천이에요동물처럼 오로지 지금의 순간만을 사는 인간을 만드는 게 내 꿈이죠.

 

끊임없이 생산되는 가짜뉴스들이 지겨운 수준을 넘어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가짜 기억을 주입하고 있다개개인이 매번 팩트 확인을 하는 선택은 거의 불가능한 대응방식이다재생산 속도는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다그에 휘둘리는 않는 나 자신의 유일한 방법은 의심이 가는 정보를 바로 받아들이거나 전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일이다가장 괴로운 점은 주변 지인들 중에 그런 정보의 폭탄 공격을 한동안 받고 확증편향이 생기는 경우이다그런 경우 이후의 판단에서 나타나는 오류는 의도한 것도 아니고 거짓을 재생산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은 진실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정보를 유통하게 된다이와 관련해서 베르나르가 작품 속에서 소개한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의 내용을 심각한 기분으로 읽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진실일 뿐 다른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죠.

멍청이들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 뿐이야세상은 진화하고나 역시 진화해모르는 사람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우위를 점하고 싶은 조바심에서 나오는 거야.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준단다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역사가들이 무엇을 기술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지중략그런 과정에서 약자들은 제도에서 지워지고 강자들만이 살아남았어하지만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아자연은 더할 뿐제거하지 않으니까인간만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을 내놓을 뿐이야.

 

연구하고 탐구하고 현장학습도 마다않는 작가의 작품답게 베르나르는 이 책에서 수없이 많은 왜곡된 역사들에 대해 빼곡하게 느껴질 정도로 언급하고 있다물론 자료 수집 또한 충분한 듯 보인다충분히 동조할 팬의 심정으로 보아도 정말?!이라는 의문이 드는 사례들도 있다인류의 역사에서 왜곡한 역사적 사실들이 아무리 베르나르의 작품이라지만 이 책 한권보다는 넘쳐 나리라는 우울한 자각이 든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의 얼굴에 떨어진 사과가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였다사과 이야기는 낙하 운동의 원리를 기억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볼테르가 지어낸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기 드로브(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영화제작자)가 말한 <스펙터클의 사회>에 살고 있어역사는 식료품 같은 소비재가 됐어맛을 내기 위해 달거나 매운 소스를 뿌려야 하는 패스트푸드와 똑같이 돼 버렸다고.

 

역사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서 베르나르는 [최면]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이 책의 목차가 히프노스와 아틀란티스 2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히프노스란 그리스 신화의 잠의 여신이다이에서 파생한 영어 단어가 Hypnosis, 최면이다이때 전생은 하나가 아니며 백 개가 넘는 기억의 방에 차곡차곡 분류되고 보관된 각각의 전생들을 찾아가며 기원전으로, 1만 2천 년 전 아틀란티스로 소환된다. 전공 탓에 플라톤이 바로 떠오르는 점이 잠시 괴롭다. 



다양한 전생을 접하는 르네라는 인물은 역사 교사이며 모든 역사에 흥미를 지닌 탓에 어느 시대에나 놀라울 정도로 잘 적응한다이런 인물이 이끄는 내용 전개가 부드럽고 가독성을 높인다그 와중에 현생에서도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들로 여러 장소를 전전하니 지루할 틈이라곤 없어 아껴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몰입해서 술술 읽히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지.

모든 역사에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나의 관점타인의 관점그리고 진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의 기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기록 말살형즉 망각의 형벌은 대역 죄인에 대한 기억을 사후에 모조리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죄인의 사후에까지 계속 적용되는 이 벌은 한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악의 형벌로 여겨진다.

 

현생에서 고착된 기억들기억에 작용하는 작동 원리와 허점들을 지적하며 베르나르가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과거와 집단의 역사에 대한 부조리들이다그 과정에는 소위 소수민족들멸절된 인종들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소망 아르메니아폴란드쿠르드족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캄보디아인 등 이 발화되며이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대신 부탁하고 소망하는 바를 대변한다.

 

진실을 회복해 줘요과거의 일들이 진실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반박 불가능한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당신한테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진실을 회복시킬 의무가 있어요우리 모두는 당신이 가진 지식을 채워 주면서 당신을 도울 거예요.

 

자네가 우리한테 와서 물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다 얘기해 줄 걸세누구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라공식 프로판간다가 아니라우리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말이야인류는 기억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되네.

 

실제로 현재에 전해지는 주류 역사는 구전을 제외한 문자를 가졌던 승리한 문명들의 흔적이라는 사실은 꽤 예전에 배울 기회가 있었다(Language older than words, Derrick Jensen번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원작이 많이 읽히길 간절히 바라는 명저이다.) 당연히 승자 버전의 역사이고 그 역사의 장면들 또한 역사가들에 의해 다시 한 번 편집되기 마련이다그 중 가장 오래 속은 이데올로기며 현재도 그 명분이 유지되는 역겨운 것이 전쟁의 명분이다전쟁의 실체는 영토와 자원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타인들만 사지로 내모는 대규모 학살일 뿐이다그런데 전시 중에도 이후에도 승리한 자들과 그들에게 고용된 역사가들은 그런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진실을 뒤바꾸는 노력을 이어왔다희생자를 가해자로가해자는 희생자로기억은 정치의 사활을 좌우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이 가장 공들이는 것은 유권자들의 기억을 쥐어잡는 것이다.

 

앞으로 교양 없고 무식한 다음 세대가 도래할 일만 남았어교과서 내용을 앵무새처럼 읊어댈 줄만 알고뉴스와 부모의 말을 여과 없이 자기 생각으로 삼고광고와 인터넷에 휘둘리는 세대 말이야그들은 자기 생각도 없고그걸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없어이미 만들어진 생각에 그저 동조할 뿐이지패스트푸드를 먹는 격이야패스트푸드식 사고는 미리 씹어져 나온 음식처럼 맛은 없어도 삼키기는 아주 쉽잖아.

 

대부분이 우울한 기분에 둘러 싸여 살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늘 집단지성의 힘을 믿는다발현되기까지는 파악할 수 없는 힘. 그래서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하나의 법령이라도 더 힘겹게 만들어진 현 시대가 분명 자유와 평화가 증가한 시절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이 구절보다는 꼰대가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프랑스 패스트푸드는 저항도 강하고 맛도 없어 섭취량이 적겠구나 싶어괜시리 꽤 먹을 만한 한국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에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다원체 게으른대다 코로나를 핑계로 동선을 줄이다 보니 한동안 섭취한 식품들이 특정 브랜드몰들로 대부분 한정되었다문득 존재 자체가 브랜드화되는 기분이 들었다You are what you eat.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가 다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그렇게 기억되도록 각인된 것이라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최면을 통해 심층 기억을 뒤지는 일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 있어요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전보다 빠르죠망각의 속도 역시 예외가 아니에요.

 

매순간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와 양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은중략우리 위에 있는 작가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행동을 결정하고 있다는 말이죠.

 

필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읽었다천재적인 10대 작가가 쓴 것만 같은 작품을 쓴 61년 생 작가, SF도 어드벤처물도 아니지만 그 모든 장르이기도 하고다른 작가가 선택한 소재라면 별 관심이 안 갔을 아이템들도 거부감 없이 따라 가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버무려 종교와 역사와 정치를 원하는 대로 넘나들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펼쳐 놓은 화려한 구성독자로서 그가 제공하는 것들을 놀이기구 경험하듯 즐기기만 해도 좋다아무리 장편이라지만 역사와종교사회인문지리 백과사전을 맛보게 될 줄이야 즐겁게 황당하다


령 탓에 덕을 본 것인지 손해를 본 것인지가장 나중까지 맛을 잃지 않고 머무는 것은 여전히 사회와 정치에 대한 신랄한 지적들과 풍자이며더 나아가 그 시절을 살아가는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다해답도 지혜도 모자란 존재라 이번에도 어깨가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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