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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평점 :
힘들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조부모님이 차례로 돌아 가셨을 때 문의를 드려서 집을 방문해 고인의 유품을 함께 정리해주셨던 그분들 - 유품정리사 - 의 이야기인가 했다. 경우에 따라 황망하고 서글프고 많이 지친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 태도가 정중하고 말투도 조심스럽고 차분하고 능숙하게 위로를 건네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참 많은 도움을 받았단 생각에 고맙고 좋은 인상이 남았다.
그런데 내용을 보자 그보다 훨씬 더 특수한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때로 고독사에 대한 기사를 접하기는 하나, 사후 처리에 대해 진지하게 궁금한 적이 없어서 처음 알게 된 직업이다. <죽은 자의 집 청소>를 하는 분들은 특수청소부들로서 범죄 현장, 고독사, 자살 현장, 동물사체 처리와 저장강박증 환자의 집을 작업 현장으로 삼는다. 안타깝게도 가장 많은 유형은 고독사 현장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느낀 바도 그렇고 통계상으로도 대한민국 고독사는 날마나 증가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1056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를테면 ‘컨트롤 제트(Ctrl+Z)’의 업무를 하는 겁니다. 소거(消去)작업인 거죠. 영어로는 언두잉(un-doing). 한 사람의 생전 흔적을 완전히 없애는 거예요. 쓰던 물건부터, 남겨놓은 핏자국과 마지막 냄새까지요.”
이 책의 저자이자 8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김완 하드웍스 대표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인상적인 내용은 누군가가 사망한 장소, 부재하는 장소를 정리하다 보면 당사자의 존재가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면 성별, 연령, 당시의 상황, 취미, 정치색 등 그 인물의 삶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오래 방치된 바닥은 으레 기름 막으로 덮여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경을 곧두세워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 방이 바로 당신이 숨을 거둔 곳입니다. 당신은 없지만 육체가 남긴 조각들이 천연덕스레 기다립니다.
단순히 정리 작업이 육체적으로 힘들다기보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글 귀, 아찔할 정도로 충격이 오는 물건들의 의미, 김완 대표이자 작가는 이 일을 하면서 현실이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걸 실감한다고 말한다.
상상 밖의 일이란 소설이나 영화처럼 일정한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허구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의도 없이도 매우 구체적이고 엄연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암흑 속의 집 안 상태와 계량기가 철거된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휴대전화 저편에서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듣는다. 침묵은 때때로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줄이거나 보탬 없이 그대로 전하는 힘이 있다. 그녀는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으레 듣곤 하는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 대신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이전엔 그저 기사에 쓰인 감정을 받아 읽듯이 그냥 읽었는데, 잠깐 멈춰 생각해보니 ‘고독사’란 표현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저자의 말대로 이들은 ‘고립사’ 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싶다. 고립된 사회적 상황에서 죽은 이들. 저자는 자살이라는 죽음이 개인의 순전한 선택이냐고 묻는다. 이 도시에서 전기를 끊는 행위는 결국 죽어서 해결하라는 무언의 타살 권유가 아니냐고, 체납요금을 회수하기 위해 마침내 전기를 끊는 방법. 정녕 국가는 유지와 번영을 위해 그런 시스템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가 하고.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전기가 끊겨본 적 없이 살았다는 것이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직장도 인간관계도 하나씩 끊기고 마침내 전기마저 끊겨 어둠 속에 오롯이 남게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이라는 것이 아직 남은 것일까.
더구나 자살을 앞두고 의뢰 전화를 하는 이들도 있다니...... 죽음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직업들 중 하나일 것이다.
“저는 평소 자살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편입니다. 존엄한 자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가 조심스럽잖아요. 그런데 막상 자살하겠다는 전화를 받으니까 필사적으로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길로 119에 전화를 했죠.”
부탁하건대,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자살을 막은 것을 용서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 순간 살아야 했고, 당신을 살려야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배를 타고 있다. 그것만큼은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다.
여름에는 더욱 힘겨운 현장 환경이란 생각이 들지만, 김완 작가는 현장 동행 취재도 거절할 정도로 이 일은 정신적 외상이 상상 이상이라고 한다. 한 차례 작업 후 잠수타는 직원들도 있을 정도로 참혹한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트라우마를 대신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이 직업을 ‘트라우마 클리닝’으로 부른다 한다.
대표 자신도 악몽과 해방감, 성취감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피아노를 치면서 손끝에 남은 생생한 느낌을 흘려버리고 트라우마를 치유한다고 한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용서하세요, 문 앞에 도착하더라도 애써 예의를 갖춰 벨을 누르지는 않겠습니다. 저 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남긴 것이니까요.
평소 고양이를 사랑해온 인간으로 이 참담한 상황에서 털만 보고 종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기가 막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 속담 뒤에 스며 있는 명예 지상주의와 지독한 인간 본위의 세계관이 늘 못마땅했다. 이름과 가죽을 남기는 일 따위가 죽음 앞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사를 설립할 당시에는 뭐 먹고 살지,하다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과 의미를 가진 일이 되었다고 느껴진다. 특히나 읽다 보면 일기와 같은 기록물인지 산문시를 읽고 있는 지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저자의 감정이 뭉치기도 하고 녹아 풀리기도 한 듯한 내용들이 특히 그러했다.
당신이 하는 일처럼 내 일도 특별합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귀중한 사람이 죽어서 그 자리를 치우는 일이거든요. 한 사람이 두 번 죽지는 않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뿐인 그분에 대한 내 서비스도 단 한 번뿐입니다. 정말 특별하고 고귀한 일 아닌가요?
여전히 글을 쓰고 - 문예창작과 시 전공 출신 - 살지만, 죽음을 보며 삶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인생을 너무 무겁게, 진지하게만 보지말자……. 이 책을 읽으며 화창한 날임에도 문득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무엇인가 싶어 기분이 어둑해진다. 경험이 일천해서인지 나는 지혜와 이해를 얻기 보단 자꾸 어깨가 무거워져 축 쳐지는 기분이 든다.
그의 쓰레기를 대신해서 치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삶에 산적한 보이지 않는 쓰레기를 치우는 것 같다. 내 부단한 하루하루의 인생은 결국 쓰레기를 치우기 위한 것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해답도 없고 답해줄 자도 없다.
이 책을 읽은 덕분에 관련 정보를 찾아보다 유품정리사도, 특수청소서비스도 아직 한국에서 직업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왜 이리 느린 것일까. 직업 개요와 업무 내용이 파악되면 실정에 맞게 바로잡아 등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이 분류될 공간이 없다니.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중략. 고급 빌라나 호화 주택에 고가의 세간을 남긴 채, 이른바 금은보화에 둘러싸인 채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는 본 적이 없다. 부름을 받고 다다르는 곳곳에 가난과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검게 색 바랜 빈곤의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져 도처에 널브러져 있는 것 같다. 내 시선이 오랫동안 가난에 물들어 무엇을 봐도 가난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일까? 어떤 날은 죽은 이의 우편함에 꽂힌 채 아래를 향해 구부러진 고지서와 청구서마저 가난에 등이 휜 것처럼 보인다.
달리 생각해보면 가족은 연락을 끊어도 채권자는 끊임없이 안부를 묻는 셈이다. 빚 있는 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은 혈육보다 오히려 채권자가 아닐까? 중략. 돌려받을 돈이 있는 자는 그 누구보다 빚진 자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아 있길 바랄 것이다. 빚을 모조리 회수하는 그날까지.
이러저런 이유들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당연한 일상이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도 사망률이 14%를 넘어가는 영국에 거주하는 친구와 애절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세상이 실제보다 더 텅 비어 보인다. 사는 일에 대해 면면들을 알면 알수록 온갖 기대와 희망이 휘발하는 내 감정이 투영된 것뿐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세상을 텅 빈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자연사가 아니다. 구인신문을 펴고 마지막 식사를 마치지 못하고 혹은 정리를 하고 준비를 하고 혹은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전화를 옆에 두고 누군가가, 어쩌면 짐작보다 많은 이들이 떠나려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그 쓸쓸한 자각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처럼 대부분은 가난 때문에 고립되어서. 함께 먹고 함께 사는 세상 또한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왜 어려운 일인가. 대답할 첵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혼자 사는 도시인의 사회적 고립 문제는 피치 못한 결과라기보다는 어쩌면 각자가 실리를 위해 선택한 길. 농촌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덜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중략. ‘인구절벽’이란 표현은 도시에서나 통할 위협이지, 시골 마을은 진작 그 절벽마저 무너지고 흙이 쌓여 봉긋한 무덤 터가 된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