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줘서 고마워 - 고위험 임산부와 아기, 두 생명을 포기하지 않은 의사의 기록
오수영 지음 / 다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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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병원에 가지 않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인공지능보다 순간 이동 기술이 필요하다가끔 택시 기사님이 험악할 만큼 빠르게 운전하실 때면 속으로 왜 이러실까하고 불안했는데 그때는 말 그대로 총알택시처럼 운전해 주시니 너무 고마웠다.

 

희망을 주는 의사에서 절망을 주는 의사가 될 수밖에 없던 내가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부모를 대신해 임종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살아 보면’ 사는 일은 아무 것도 평범한 것이 없고 당연한 것도 없다는 당혹스럽고 황망하고 충격적인 현실과 만나게 된다꿈꾸던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그 혼돈의 길 끝에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자신이 버티고 있다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고타인도 잘 모르겠고 사회도 세상도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통 모르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개인적인 경험입니다안 그러신 분들도 많겠지요부럽습니다.) 그러면 이제 타인과 부부가 되고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고 이런 일들이 까마득한 도전 최고봉으로 느껴진다그러다 어느 시절 사는 일은 언제 어떻게 방향을 선회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세찬 계곡물과도 같이 튀어 오르기도 한다.

 

나는 1995년도에 결혼해 이제 다 큰 딸이 있는데이 산모는 같은 해에 결혼해 이제 처음으로 엄마가 된 것이다이처럼 세상은 임신과 출산에 관해서는 불공평하다.

 

임신을 하면 아기가 구조적으로 정상적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만실제로 태어나는 아기의 2-3 퍼센트는 확률적으로 구조적인 이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 설명을 지금가지 천 번 이상은 한 것 같다.

 

가족 중에 고위험산모로 분류되어 출산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이가 있었다입덧도 너무나 심해서 수분섭취 외에는 거의 입도 못 대서 산달에 이르자 산모가 18kg이나 체중이 줄었다지켜보는 주변인들조차 이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니냐고 겁을 먹던 시절그래도 신기하게 태아는 자라서 3kg대로 태어났다그 과정에서 정기검진 받으러 병원도 다니고 그렇게 몇 달을 노심초사하며 행여나 혹여나 마음을 극한으로 졸이며 산다는 건 참 두 번은 못할 일이다 싶었다.

 

임산부와 일반인의 착각 중 하나는 모든 임산부와 태아를 기본적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는 서울에서 365일 교통사고가 100퍼센트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아기를 낳다가 죽는 게 말이 되냐고 묻지만 분만 의사의 답은 이렇다.

아기 낳다가 드물게 죽을 수 있습니다임신이란 생리적인 상황인 동시에 병적인 상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그저 산모와 아이가 무사한 거 외에는 다른 아무런 소원이 없었다,는 것이 순전한 진심이었다그런 시간을 거치며 몰랐던 일들도 알게 되고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누군가는 무사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당사다가족의료진들 누구 하나 애쓰지 않은 이들이 없기에임신과 출산 관련 모든 일과 직업은 업무 강도가 최고조로 솟구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산전에 발견되는 어떠한 선천성 기형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중략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자이는 아이의 고생이라기보다는 아이의 고생을 옆에서 보고 싶지 않은 어른의 마음일 뿐이다.

 

조산아들 중에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아이들 당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그래서 내가 키워줄 게 아니라면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말을 쉽사리 건네기도 참 어려울 것이다간혹 장애아와 재활치료를 오랜 기간 하던 보호자의 자살 소식이 들리기도 해서 그럴 때는 너무나 마음이 쓰리다


예전 타학과의 젊은 교수 부부가 임신 중 태아의 장애 진단을 받았는데도 출산하기로 결정한 일이 크게 회자되었다다들 너무나 용기 있는 일이라고부디 불행 중 다행이기를경증이기를 기원했지만아이는 중증 뇌병변으로 인해 시선을 맞추는 것 외에는 말을 하는 일도 어려운 상태로 자라났다언젠가 그 교수님이 학내 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평생의 소원이 자신을 부르는 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어쩌면 나중에 시계를 함께 보며 시간을 가르쳐줄 수 있는 일도 있지 않을까그런 내용을 담았다간혹 이렇게 다 알고도 큰 용기를 낸 선택을 하는 분들이 있다.



정말 안타깝게도 임산부 중 일부는 의사의 말보다 역술인의 말을 잘 듣고 더 믿는다의사의 권고에 반하는 경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중략자궁내태아발육지연 때문에 유도분만을 해야 했더 임산부도 그랬다역술인이 어느 시점에 낳는 게 좋다고 했다면서 의료진이 권한 수술 시간을 거절했다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사망한 뒤에야 병원에 왔다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임산부와 태아에게 최선의 출산 시기를 결정하고자 노력하는 산과 의사로서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시인가요?”

 

주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면 진통이 온다고 해서 계단으로 20층까지 올라갔는데그 뒤에 배가 너무 뭉치고 아팠어요결국 병원에 갔더니 태반조기박리되어 아기가 잘못되었다고......” 아니계단을 오르내린다고 진통이 걸린다면 이 세상에 유도분만이라는 게 없어졌겠지의사의 충고보다 옆집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임산부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가끔 있다아마도 우리 몸이 기계가 아니기에 사람마다 치료나 약제에 반응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환자와 의사의 신뢰는 결국은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중환자실로 회진을 갔더니 어제 피바다가 되었던 전쟁터수술을 집도했던 그 자리에서 환자가 눈을 깜박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선생님물 마셔도 되나요?”

평소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질문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도 건넨 적 없던 산모의 질문을 받으니 어제의 피로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물을 먹어도 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살아주어 고맙다고.



5-6 주의 배아와 9-10 주 이후의 태아가 얼마나 다른지초음파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 이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간절히 바란다.

 

부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임신과 출산 그리고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혹시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지또한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나온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느끼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에세이를 읽다 보면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에 대해 가장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읽는 것뿐이지만 없던 이해가 생기고 공감이 든다그런 독서 경험이 있으면 이후에 실제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이를 만났을 때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특히나 이야기 하나하나 가볍게 쓰여지지 않은 이런 에세이는 더욱 그 효과가 선명하고 오래 남는다.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만이 에세이의 순기능은 아니다적어도 나는 언제나 독서의 효능이 나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방향성을 예외없이 지니고 있어서불안한 세상불신이 들쑥날쑥한 세상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잘 하는 이런 분들이 의지가 되고 안심이 되고 치료약이 되기도 한다간혹 어떻게 아직 세상이 안 망한 건가 의아할 만큼 엉망진창인 면면을 보게 될 때도 늘 더 많은 이들이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삶을 떠받치고 있다는 희망을 떠올릴 수 있다사회에 환원할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늘 참 감사하다.

 

세상에 쉽게 오는 생명은 없다다만 우리가 미처 모를 뿐.



이 책의 수익금은 출생 전후 염색체 이상을 진단받고 삼성서울병원에서 태어나 치료받는 아이들의 치료비로 기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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