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유치원
안녕달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장을 열고 잠시 어리둥절했을 만큼 이토록 어여쁜 가제본은 처음이다.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이라 가제본을 읽으면서도 이런 충분한 호사를 누리는 기분.


누구나 때때로 긴장을 풀고 하고 싶은 말도 잘 하면서 사는 일은 중요하지만,

본인 긴장을 푸는 일에 그치지 않고 배려가 부족한 태도와 말을 하는 이들은 늘 있었지만,

오늘따라 감정이 요동쳐서 막 짜증이 나려는 순간, 자가 치료처럼 이 책을 집어든 선택을 칭찬하고 싶다.

 

두 권이라면 한 장씩 떼어다 큰 그림으로 만들어 벽에 붙여두고 싶다.

색감도 질감도 디테일도 내용도 감성도…… 늘 이런저런 부작용이 따르는 치료약 따위 저리가랄 만큼 완벽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부글거리던 머릿속이 사르르 식는다.


마크 표시 보이세요? 거름(compost) 만드는 용도 표시랍니다. 


손과 앞치마에 살짝 묻은 클레이,  뒷 허리춤 옷주름, 책장 책들이 나오고 들어가고 높고 낮고 기울고 

하나하나 경탄하며 봅니다. 


이번에도 허리춤 올라간 윗 옷, 아이들 높이에 맞춘 손잡이, 

용무가 급한 아이들의 자세, 유리창을 비워두지 않고 당근 드시는 누군가(?) 

감탄이 한숨처럼 나옵니다.


적당히 어질러진 식탁, 당근 달라는 아이 의자가 뒤로 넘어간 것이 백미입니다. 


가제본이라 판형이 조금 작은 듯해서 시선을 바짝 대고 이러 저리 요모조모 열심히 보았다.

현장 취재 나가셔서 사진 찍은 거 다 모아서 베끼신 거 아니에요, 여쭤보고 싶을 만큼 디테일이 섬세하고 그런 부분들 덕에 그림동화 캐릭터들이라는 걸 싹 다 잊고 몰입해서 여러 번 보았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틀린 그림 찾기처럼, 같은 배경에서 뭔가가 달라졌을까 왔다갔다 넘기며 보고.


8시만 되면 열심히 울고 있는 뻐꾸기 시계가 반갑고,  

선생님께 칭찬받은 클레이작품 코끼리가 당당하니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기쁩니다. 


창비아동도서를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한다는 것은 자타공인이고, 안녕달 작가의 책은 특히나 그러하다. <안녕>을 볼 때도 아이들이 웃는 동안 다 큰 어른들(?)인 나와 동생이 가장 먼저 눈시울을 붉혔다.

 

이전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차분히 그림을 보면서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상상하고 느끼는 마치 명상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었다면, <당근유치원>은 유치원과 아이들과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모두 등장하고 - 나무와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보랏빛 새들도 - 아이들이 행복하고 떠들썩하게 재잘거리는 귀여운 대화들이 조잘조잘 귀엽게 수다스럽고도 적확한 입말들로 표현되어 있다.



당연히 아이들을 기르는 부모님들도 해야 할 말들이 있으시고, 유치원 선생님들도 안전과 교육을 위해 때론 큰 목소리로 말을 하셔야 한다. 그림들만으로도 행복한데 입장에 따라 읽어도 재미난 내용이 한 가득이니 떠들썩한 봄날 같이 즐겁고 행복한 그림책이다.

 

새로 등원한 얼굴이 빨간 아이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으레 다들 하는 아이다운 행동들을 벗어나지 않는 너무나 평범하게 귀여운 캐릭터이다. 긴장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아주 편안하게 웃으며 지켜볼 수 있는 ‘우리 아이가 조금 달라졌어요’ 같달까. 귀엽다, 귀엽다, 아휴~ 귀엽다.


우리 집 작은 꼬맹이는 예전 유치원 선생님이 매일 화려하고 귀엽고 기발하게 머리를 묶어 주셔서 얼마나 신나고 기뻐했는지 모른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똥손이라 아이에게는 그 기간이 멋 부리기가 가능한 유일무이한 시절로 남았다. 바쁘신데 노고를 더할까 조심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중단하셔도 아무 원망(?)도 안하겠다 말씀 드렸더니, 아들만 둘이라 해보고 싶었던 소원 풀이하는 거라 말씀하셔서 가족들 마음속에 기쁨과 환호의 함성이…….

 

마지막으로 내게 특별한 감동을 더한 이 책의 미덕은 안녕달 작가님의 시선이 아이들에게만 모이지 않고 아이들이 모두 귀가한 후 선생님들의 남은 업무와 표정에 차분히 머물러 주시는 것이다. 한참 선생님들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니 마음이 달달하게 풀어진다. 무대 뒤, 이면, 끝까지 남는 이들을 빠뜨리지 않고 이토록 따스하게 표현해 주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작가님의 태도와 시선이 존경스럽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자식이란 관계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모두 다 귀한 개별적 인격체이다.



아이들이 무탈하고 즐겁게 보내는 일상을 유지하느라, 하루 종일 누구의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가르치고 사랑까지 해주는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것……. 연봉에 따라 급수가 정해지는 직업 세계에서 때론 부당하고 억울하지만 그래도 계산으로는 다 설득할 수 없는 감성과 의미를 담아 교육 환경에서 애쓰시는 분들의 현실도 좀 더 잘 알아주시면 좋겠다. 가해자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직군 전체를 성급하게 일반화해서 비난하고 욕하는 일은 너무 천박하고 잔인한 게임이니 하루 빨리 중단되길 바란다.


당근유치원의 다람쥐 교장선생님은 

말씀도 없이 하루 종일 온갖 뒷정리와 청소와 그 외 필요한 일을 쉬지 않고 하십니다. 

저도 이 장면에서는 못 찾아 보고 지나칠 뻔 했습니다.


마치 돈만 밝히는 속물 의사들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전문 의료직을 존경하면서도 경멸했던 우리 사회가 코로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의료종사자분들 -의사, 간호사, 연구자, 그리고 의료진들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다른 모든 업무 지원을 해 주신 직원분들 등등 - 이 자기 이익과 갈등과 심지어는 건강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일단 사람들을 살리자’는 간단한 이유로 기꺼이 달려 나와 애쓰신 모습들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울게 되어도 웃게 되어도 차분해질 수 있게만 되어도 늘 참 좋은 안녕달 작가님의 그림책이다. 생일을 맘대로 옮길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신간이 출간되어 읽게 되는 날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늘도 마구 엉클어져서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했을 지도 모를 나 자신이 그림책을 읽고 보는 것만으로 좀 더 괜찮은 사람의 시간으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