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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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된 작품들 중에서는 당시의 인상적인 느낌을 일깨워주듯 반가운 이미 읽은 작품도 있지만새로 알게 되어 흥미로운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일단 마구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하루 종일 책만 읽고 살아도 되면 좋겠다 싶게 시간이 아쉽다그 중에서도 제일 반가운 작가는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주목한 문학초점의 내용이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벌써 10마음이 쏙 드는 장르를 마음에 쏙 들게 써서 들려주는 이 작가가 one hit wonder로 사라질까봐 신간이 나올 때의 기쁨과 환희와 휴지기의 염려와 불안을 번갈아 맛보며 살아온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언제나 신간 소식을 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이 책은 <창작과비평봄호에서 다뤄주지 않았다면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나는 장편 소설을 더 좋아하는 취향이다프리다이빙을 하듯 한 장소를 정해 깊이 잠수하는 그 느낌을 원하고 좋아한다그래서 정세랑 작가의 작품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단편집을 고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초창기부터 근래 발표된 작품들까지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기란 꾸준히 쓰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믿는 나로서는짧지만은 않은 8년 동안 작가의 세계관도 스타일도 한결같은 점이 참 대단해 보인다.

 

이류니 삼류니 하는 평가를 받든 말든 SF 창작물을 글을 알게 된 이후 쭉 좋아하는 독자로서, SF 소설들의 흔한 분위기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자신이 제안한 미래와 세계를 멋지게 보이게 하려고 현재와 현실을 여지없이 비난하고 부정한다그런 후에는 끝 간 데 없이 묵직한 세기 말 분위기나 어서 빨리 세계인류공동체로 인지하지 못하면 모두 다 끝난다며 무식한 인간들을 계도하려는 미션에 사로잡혀 내내 고함을 지르는 분위기혹은 손 쓸 수 없이 이미 망가져버린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신성한 임무를 강요하는…… 읽고 나면 과식이나 배탈로 복통이 날 듯 한 내용들이 생각보다 많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라 재밌어하며 또 찾아 읽을 나의 취향에 솔직하게 좌절한 적도 꽤 있었다.

 

그러다 분위기가 이 장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첫인상을 주는 따스한 표지의 정세랑 작가의 SF를 처음 읽으면서마치 독소 배출과 정화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 같았다늘 반갑고 매번 참 좋은 이 작가의 글에 대한 느낌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착하고 아름다운 진짜 재밌는 꿈을 신나게 꾼 것만 같은 SF 세계?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나의 이런 졸문으로 인해 정세랑의 SF는 유치하고 얄팍하다고 혹여나 생각하는 분들은 없기를 바란다정세랑처럼 여성과 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서술해내는 작가는 드물다그러면서도 거대담론이나 주류윤리를 퍼붓지 않고 더없이 사랑스럽게 감정을지지 않으려는 노력을정당방어를 하듯 살아가는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는 세계가 제일 중요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인물들을 매번 더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등장시킨다.

 

생각해보면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언니가 죽는다 해도 언니가 죽어서 딱 좋은 정도로 숙성된다고 해도 먹지 않을 정도로 언니를 좋아해요.

그런 낭비를 할 만큼 좋아한 사람 없었어요지금까지

 

공격성과 폭력성이 없는 남성 캐릭터들 - gentle - 역시 마음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활짝 열리고 호감이 듬뿍 솟는다세상과 사람들을 망치는 몸튼튼 머리텅텅 저질스런 캐릭터들이 난 정말 지긋지긋하다남자다진짜 사나이다류의 남자다운 특성은 정세랑 세계에선 악역을 제외하면 없다.

 

누구와도 좀처럼 말다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좋아했어요.

농담으로라도 비열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배려하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라 좋았어요.

오빠는 자주 아팠는데그래서인지 제가 조금이라도 아픈 날이면 귀신처럼 알아채곤 했었어요.

오빠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았더라면 좋아한다고 더 일찍 말했을 텐데.

 

세계를 조망하는 폭이 넓고저항의 메시지도 음악처럼 은근하고 한결같이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인간과 세상에 대해 작가가 포기하지 않는 낙관이 반갑다그리고 억지로 덧발라진 어색한 전개도 없어서 정말 재미있다분명 현실과 일상에 밀착된 다큐처럼 생생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신선한 SF로 옮겨가 있다정세랑 작가의 상상은 그 아이디어가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독자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 해서 낯설지 않다.

 

첫사랑이 조금 더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사랑이 바래는 것은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므로

이제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사랑은 유지되었다.

 

능력과는 별개로 정신적 문제가 있지 않으면 광신자로 묘사되기도 했던 초능력자가 뜻밖에 제일 코믹한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고행성을 운영하는 대단히 지성적인 식물체인 나팔꽃 언니 호칭이 정말 정겹다 는 미소로 맞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예쁜 캐릭터이다정세랑 작가는 나팔꽃 언니를 절친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분명하다.

 

담백한 문장들에 마음이 넘쳐흐른다상상이라도 절절하게 그리워한 누군가를 볼 수 있다면알고 보니 다 거짓이고 불가능한 일이었더라도 기꺼이 속아서 달려가는 그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11분의 1>을 읽고 나니 예전에 <피프티 피플>을 읽고 난 뒤처럼 눈물이 또르륵 흐른다<목소리를 드릴게요>는 하루 빨리 영화나 드라마로 재탄생되었으면 좋겠다아동도서도 아니고 만화도 아닌데기쁘고 반갑게 꼬맹이들이 가장 짧은 단편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을 재밌게 읽고 신나한다행복한 시간이다.

 

완벽한 풍경이었다.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 해도.

그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다시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완결성이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

 

어서 어서 다음 신간을 하사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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