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소나기 은빛 구름
박종원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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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딸을 잃고 연이어 아내마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처음부터 소개되면서 주인공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후 주인공은 혼자 남게 된 자신이 느끼는 절박함과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로 인생의 행로를 정해 가게 된다. 장편 소설답게 그 후로도 상당한 분량이 감정적으로 파탄이 난 상태의 어수선하고 복잡한 시공간을 오가며 드러나는 조각들을 퍼즐처럼 기억하고 천천히 맞추어가는 스릴러의 형식을 따른다.

 

스릴러 소설의 소재로서는 특이하게 등장하는 댄스에 관한 저자의 자료 조사가 상세해서, 나처럼 문외한도 만약 관심이 있다면 저자가 등장인물을 통해 제시한 단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상당한 이론적 준비가 된다. 꽤나 방대한 내용과 다층적인 구조를 가진 500쪽이 넘는 분량의 장편소설이다.


나 홀로 모래사장에 앉았다. 아득한 지평선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가끔 은빛 구름에서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흔적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론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변덕스러운 소나기만큼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황금빛 소나기 은빛 구름>이라는 제목이 빛나는 희망과 말랑한 행복을 의미할 것 같았던 첫 인상과는 달리 저자의 글 호흡은 굉장히 길고 한 번에 읽어내기에는 버거울 만큼 촘촘하다. 저자와 주인공처럼 독자 역시 제대로 몰입해서 읽어 나가야지만 마라톤과도 같은 이 소설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스릴러 추리 소설을 읽는 일반적인 독법에 맞게 표현된 문장들에 드러난 힌트들을 잘 읽어내고 기억하는 노력과 함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하는 활력이 넘치는 음악과 댄스라는 소재를 잘 감상하고자 한다면, 가끔은 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상상해보는 노력도 소설 전체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과정에서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을수록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삶의 진짜 모습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주체에 따라 수많은 변이를 가지는 삶의 모습들을 일단 그렇다고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들만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들 속에 녹아 들어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주인공의 말과 태도를 통해 반복해서 추리하게 한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냐.’

아내는 결혼 전부터 이런 의미의 말을 종종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사실이 모두 진실은 아냐.’ 중략.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전부는 진실일 터였다.

전부가 진실이 아니라면 보이는 것만 믿고 싶은 것일 터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자신도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죄책감을 가지는 이들이 있고, 현실 사회에서도 분명히 때론 자주 일어나기도 할 것이다. 스케일이 방대한 만큼 등장인물들 역시 다양한데 거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옴니버스를 떠올릴 만큼 각각의 캐릭터들이 강렬하고 개성 있게 소개된다. 그런 만큼 이들 사이의 관계들이 개별 스토리텔링을 통해 생동감을 충분히 제공한다.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소설을 읽는 기분만이 아니라 장편 범죄 영화를 몰입해서 시청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작품이 제공하는 또 다른 매력이자 흥밋거리다.

 

댄스, 춤이라는 소재를 극심한 혼돈에 갇힌 등장인물이 일종의 출구로 선택한 점이 생경하면서도 적어도 내게는 완전히 낯선 세계의 모습이라 읽는 내내 궁금하고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온갖 모순과 이율배반, 노력이나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방지할 수 없는 비극들이 혼재한 삶을 살아가야하는 불안한 이들이 언어만으로는 충분하게 선명하지 않은 자신의 감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솔직하게 드러나는 몸의 언어, 춤을 선택한 것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내게도 미리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그 감각을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범죄 스릴러 장르이지만 제목에서 충분히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고 읽는 내내 기대했기 때문에 비극과 불행을 보고 싶지 않은 심정을 다독이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심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당하며 깊이 파묻힐 것만 같은 짙은 농도의 감정들과 반전을 드러내는 사건들이 있지만, 다행히 댄스라는 출구가 의외의 역동적인 몸짓으로 묶여 있는 감정들을 털어버리게도 한다. 덕분에 한식 코스요리를 즐기고 난 이후처럼, 전체적인 느낌은 다양한 인물들과 다양한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몰입이 방해받지 않아 큰 재미로 수렴되는 인상적인 장편소설이다.

 

밀착된 관계들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현대의 시공감에서 어쩌면 타인의 죽음은 그저 사건과 사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는 그러한 무심한 시선을 가진 우리들에게 그 속의 불편한 진실을 하나 보여주고 싶은 지도 모른다. 정갈하고 깔끔한 사건 처리로 마감되고 마는 삶을, 불편하고 아프지만 우리 모두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뜨거운 시간들을 견뎌내다 혹은 실패하고 혹은 살아남는지 그 진정성을 보여 주려 한 지도 모른다.

 

표정을 보니 무엇인가 꼭 전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이승에서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지.

 

어쩌면 진짜 가해자는 사라지고 또 다른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기도 하는 경우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저자처럼 주인공처럼 끝까지 은폐되고 조작되는 진실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다면 연약하고 불안한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이겠는가를 저자는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리 과정을 망치지 않기 위해 내용 소개를 마감하며, 마지막으로 댄스와는 떨어질 수 없는, 따로 갈 수 없는 음악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보너스처럼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장면들에 등장하는 음악들이다. 음악만은 상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등장하는 음악들을 찾아 플레이한 상태로 읽어 나갔다.

 

그저 익숙한 우울인지 체력이 더 저하되어서인지 매번 뭐가 원인인지는 모르고 견디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섬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라틴아메리카 음악 Bachata, 기타와 퍼커션이 친밀한 파트너로 어우러지는 부드럽고 경쾌하고 감미롭고 매혹적인 리듬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노래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삶을 흥분시켰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 

오랜 기간 인간의 집단 무의식에 숨 쉬어 온 축복이고 축제였다.

 

장편 소설다운 묵직함, 고단하지만 해결의 희열이 중첩되는 스릴러 소설의 추리과정, 그리고 흔치 않은 소재인 음악과 댄스의 페어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확실히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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