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 공책 1 - 도리스 레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창비세계문학 73
도리스 레싱 지음, 권영희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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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에 25년 전 대학원에서 읽은 책들이 개정되거나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었다당시에는 한글 번역서도 없어서 영어로만 읽었던 책들이라 집중하고 애쓴 것에 비해 남아 있는 내용이 거의 전무하다반갑기도 하고 하나같이 쉽게 읽히는 내용들이 아닌 것을 기억하는지라 조금쯤은 망설이다 마치 도전하는 심정으로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저자 도리스 레싱의 저명함은 설명이 사족이겠지만 또 다른 저명한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20대 초반에 이 책을 읽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눈을 떴다고 극찬한다. 그에 비해 20대에 이 책을 읽은 나는 차라리 이론서가 더 낫겠다 싶은 비참한 심정이었다당시 문학적 이해력이 부족하던 내게 특별한 도전을 끝까지 요구하던 무시무시한 작품물론 저서 자체의 명성과 저자의 능력이 의심할 바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헤맴과 오독은 순전히 나의 능력 탓이다.

 

어쩌면 1950년대 후반을 다루고 1962년에 출간된 이 책의 내용이 현재에 어떤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겠냐고 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지만, 25년 전에 한번그리고 지금 다시 읽어본 나의 감상은 변하지 않은 현실이 절망스러운 만큼이나 이 책에서 선명하게 지적해내는 장면들이 바로 적용 가능한 시각과 세계관을 여전히 적용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은 페미니즘 문학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이 아니라 20세기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해당하는 시대와 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얕기 때문에 당시 인물들이특히 여성 작가의 일상적인 삶과 추구하는 가치들과 그 속에서 분열되는 자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있지만그 역시 내 자신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뿐이다게다가 인문사회학에 대한 공부도 부족해서그 시절 서구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반전(反戰)운동공산주의의 몰락여성해방운동 등의 주제들을 기본적인 내용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문학 속에 녹아든 의미들을 눈 밝게 찾을 수가 없었다어쩌면 당시 내가 시몬느 드 보봐르의 <2의 성>을 비교적 잘 따라가며 읽고 중요한 내용을 파악했다고 느낀 것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몇 편의 글에서 반복하여 예를 들기도 했지만한국 사회는 오랜 세월 공고했던 가부장제와 다른 모든 가치들을 뒷전으로 물린 경제성장 논리의 부작용들이 염려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심각한 사회적 범죄로 표출되는 끔찍한 경험들을 몇 년간 겪고 있다끊임없이 기사로도 재생산되고 있는 내용들이기도 하지만결혼과 출산육아이혼율 등은 이제 특정 개인들의 개별적 특수성이나 특정 세대의 이기심 혹은 성별에 국한된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그중 외로운 여자 다섯 명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도혹은 그들 탓에 조용하게 혼자서 미쳐가고 있었다모두 스스로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다자신이 행복하다는 이유에서 죄의식도 가지고 있었다예외 없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279~280


내 안의 긴장이 시작되었고 평화는 이미 사라졌다스위치가 켜지고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재닛에게 옷을 입히고 아침을 먹여 학교에 보낸 다음 마이클에게도 아침을 차려줘야지차가 다 떨어졌다는 거 잊지 말고기타 등등기타 등등이 쓸모없지만 틀림없이 불가피한 긴장과 더불어 원망의 스위치도 함께 켜진다무엇에 대한 원망일까불공평이겠지세세한 것들을 걱정하느라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원망. 519

 

크고 작은 범죄들로 거의 매일 자행되는 사건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대중교통 속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식당과 카페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이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부재하거나 마련되는 속도가 너무 늦어서 공포와 좌절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자살이라는 또 다른 비극적 결말을 맞기도 한다.

 

이런 예들은 사실 나의 경험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데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저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가부장적인 면이 분명히 있으나 자식을 성차별하지 않고 폭력을 가하는 않는 부모를 운 좋게 만났고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성차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직장을 운 좋게 다녔을 뿐이고친구지인주변인들 역시 운 좋게 좋은 이들을 만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실제로 성차별과 젠더폭력이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 모르겠다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그것은 마치 나는 배고파 본 적이 없는데 정말 한국 사회에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여성적인 세계를 겨눈 그의 조롱은 그가 애나의 존재를 의식한 순간 시작되었다그래하지만 딱히 새로울 것도 없지애나는 이미 익숙한 터였다. (아이도 그 조롱이 자신을그리고 여성 일반을 겨누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애나는 딸에게 조용히 공감하며 생각했다그래내 가엾은 딸아빨리 익숙해지는 편이 좋아끊임없이 그런 태도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니. 42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어두운 비밀이죠아무도 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어딘가 문을 열면 그 안에서는 늘 날카롭고 절박한알아듣기도 힘든 비명 소리가 귀를 때리거든요.” 436-437

 

그래서 몇 십 년 전 탄생한 이 책의 내용이 읽을수록 대한민국의 현실을 환기시킨다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느낌이 한편으로 서글프고 두렵기까지 하다힘들 때 힘든 이야기를 굳이 찾아 읽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이지만혹시 기회가 있다면 그래도 나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불행을 증언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아주 일상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많은 공감을 나누고자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다소 경직되거나 경도된 한국 사회의 논의를 신기하게도 꼭 집어 지적해주는 듯한 내용도 있고당시에는 문학이라 더 어렵다고 느낀 부분들이 이제는 문학이라 가깝게 다가오는 점들도 있다그래서 이런 작품이 소위 세월과 무관하게 읽히고 재해석되는 명작일 것이다.

 

그건 차라리 우리 시대 여자들의 질환이다여자들의 얼굴이나 목소리에서혹은 그들이 사무실로 보내오는 편지에서 나는 매일 그걸 목격한다그들의 감정은 불의에 대한비개인적인 독성에 대한 원망이다그게 비개인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운 나쁜 여자들은 이러한 감정을 남편이나 연인에게 떠넘긴다반면 나처럼 운 좋은 여자들은 그 감정에 맞서 싸운다피곤한 싸움이긴 하다. 520

 

아직 잠든 채로나는 나 자신이 어떤 페이지에 써놓은 말을 읽어보았다용기에 관한 내용이었는데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런 용기가 아니었다그것은 모든 삶의 뿌리에 놓여있다 할 수 있다할 수 있는 작고 고통스러운 종류의 용기이는 불의와 잔인함이 또한 생명의 뿌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396

 

여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여자들만의 기사도가 있는 법이고이것은 다른 어떤 충성심보다 강력하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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