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닯구나, 잊혀진다는 것은
은애숙 지음 / 상상마당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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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 사실주의’란 분류표가 붙은 이 책의 소개글을 읽고, 내가 환상적 사실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게 뭘까, 문제를 받아 든 학생처럼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환상인데 사실주의를 따른다? 혹은 사실인데 환상으로 기록되었다? 명명 자체도 마치 모순처럼 재미나다. 질문을 지인들에게 돌려 보았더니, ‘실제에 바탕을 둔 허구’, ‘소설의 허구적 소재를 역사/사회적 배경을 녹여 실재했던 일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라는데, 뇌가 노화되어서인지 그게 장르 구분이 될 정도로 분명히 변별력이 있는 작법인지 명쾌하지 않다(순전히 제 개인 이해력에 기인합니다).

 

환상적 사실주의 좀 쉽게 이해시켜 달랬더니......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도 나오고,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기억 안 나냐고 다그치기도 하고, 비트겐슈타인도 나오다가, 코로나가 지나가면 연희동 <바벨의 도서관>에서 만나자는 뜬금없는 약속도 했다.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보르헤스 스스로 이렇게 써놓았다니 적어도 <바벨의 도서관>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텍스트인가 보다. (혹여 제가 가엾어 잘 설명해 주고 싶으신 분은 댓글을 남겨 주십시오. 꾸벅)

 

어쨌든 나는 처음으로 ‘환상적 사실주의’라는 장르의 개념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해설서도 없이 7편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을 읽었다. ‘그 사람이 지닌 어휘가 그 사람의 세계’ - 세계를 인식하는 매개가 언어이며, 개인은 자신의 언어 수준만큼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따르자면 이 책을 내가 지금 이해하는 것은 무리겠단 생각을 하면서.

 

‘애’, ‘간’이 닳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맛보는 것이 잊힌다는 사건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 듯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잊혀진 이들, 기억해주지 않은 이들이 될 것이다. 내 짐작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다를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주변적 존재로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이들 - 주로 여성들 - 이 작가의 기억 속에서조차 온전히 현실에서 복원되지 못하고, 꿈에서, 종교를 통해서, 꿈과 다를 바 없는 먼 나라 - 이탈리아 -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인상적인 점은 그래도 인류사에서 잊히지 않을 명성을 쌓은 여성인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절반을 휘몰아친 사회주의의 옷을 입은 남성혁명가들의 전체주의 실험의 광풍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차분히 들려오던 것이 그의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쨌든 그도 한 때는 철저히 잊힌 이였음이 분명하다.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한 이들이 좌절에서 벗어나 환상적 믿음을 갖게 만든 것. 버트란트 러셀

 

어떻게 환상적이며 동시에 어떻게 사실주의적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책 내용 속으로 들어갔다. <구운몽>은 입시교재 이상의 내용은 알지 못하고 몇 십년이 지났고, 그래서 생생한 이야기로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의 내용이 생경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역사서와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우연하게도 꽤 오랫만에 살아보지 못해 더욱 궁금한 시대로 오가는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구운몽의 내용이 아니라 작가가 더욱 생생하게 입말로 등장하는 부분이라, - 몰입해서 즐겁게 읽은 개인적 이유로 느낌이 증폭된 바에 기인하나 - 마치 만나 본 작가처럼 친근감이 들게 만드는 이 책의 저자의 서술이 놀라웠다.

 

허나 사람은 망각의 존재라오. 잊혀진다는 건 사람이 감내해야 할 것이라오. 중략. 잊혀진 존재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소. 기억에 의지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이 글쓰기였다오.

 

실제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이라면 기묘한 현상이나 비밀스러운 어떤 모습이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믿는 것은 비정상인가.

 

<구운몽>은 ‘독서 불가능성’으로 인해 더욱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소설은 환영과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잖아요.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이 작품은 읽히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느낌이 드네요.

 

자칫 작가는 경제적 행위와 무관해 보이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무익한 사람처럼 여겨질 수 있소.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결코 탕진되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야 할 의무를 가졌다오.

책의 특징처럼 구름 속을 노니는 듯이 그 자체로 환상주의적 소설이 끝나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작품에 들고 나는 전환에 시간이 꽤 걸렸다. 중단편 7편을 다 읽은 후에는 작가의 장르 구분없는 작품 색깔이 환상적으로 보인다. 같은 작가가 썼다고 볼 수 없을 만큼 각각의 작품들이 현저히 구분된다.

작가가 여러가지 입말투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배경도 동서고금을 자유롭게 뛰어넘는데, 배경 묘사를 하는 부분에서는 모두 다 취재를 나간 장소들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세밀한 부분들도 있다.

'환상적 사실주의'란 장르를 아직도 묶어서는 정의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지만, 환상도 사실도 시간한정적인 개념에 다름아니란 생각이 들자 경계를 교차하지 못할, 굳이 구분을 공고하게 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개념과 상상 수준에 머무르던 것도 어느 순간 현실화되면 사실이 될 것이니..​


상상하지 못한 일이란 말이 있어. 그 말은 진실이 아니란다.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거야.

장르도 모르고 작가의 메시지도 잘 이해한 것은 아니란 반성이 들지만, 그건 내 개인의 한계일 뿐이고, 새로운 매력적인 문학작품의 장르를 만났다는 즐거움은 남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환상이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 수는 있으니, 그 때 꾼 꿈은 환상적으로 바람직했다고, 그런 평을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고 싶다.​


데리다는 읽어 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읽히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걸작에 대해 설명했어. 독서 불가능성이란 문학이 환영과 허구의 세계를 다루기에 갖게 되는 속성이야. 내 생각엔 보르헤스의 단편 <모래의 책>이 이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작품인 것 같은데. 중략. 데리다는 유용성을 수치로 따지는 현대 사회가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필요하지 않게 여겨 폐기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어. 그런 사회를 안타까워했지. 중략. 몇 해 전 작고한 한국의 문학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어. ‘문학을 써먹을 데가 없기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기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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