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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이단자들 -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
스티븐 내들러 지음, 벤 내들러 그림, 이혁주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철학의 이단자들: 서양근대철학의 경이롭고 위험한 탄생』
(원제 HERETICS!:
THE WONDROUS (AND DANGEROUS) BEGINNINGS OF MODERN PHILOSOPHY)
철학자들이 아니라 ‘이단자들’이라니, 이 도발적인 제목만으로도 흥미가 솟구치는 책이다. 더구나 만화책! 이단적 요소를 살펴보자면......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많은 문제의식들이 필연적으로 과학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이단적인’ 정보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물론 당시의 가설과 설명은 직관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철학자들의 탓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과학은 ‘관찰 장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에 책상 앞에 앉아 우주에 대해 세운 가설이 바로 얼만 전 망원경의 발전으로 확인된 점은, 내게 금세기를 통틀어 가장 신비롭고 경탄스런 일이었다. 시간여행을 해서 미래를 보고 온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건지요......
특히나 이 책은 문과/이과, 철학/과학의 구분이 확고하고 그들 사이의 거리가 극과 극처럼 멀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이단적인’ 새로운 사고의 틀을 보여주거나 통합적 사고방식의 매력을 엿보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책이기도 하다. 동글거리는 그림체는 시종일관 귀엽기만(?) 하고 설명은 뭘 더 이상 어떻게 하나 싶게 쉽고 재미있다.
책의 첫 페이지는 화형당하는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이다. 이런 끔찍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독특하고 특별한 책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철학사를 통시적으로 이해하는 기본 지식이 필요하다. 우여곡절을 겪던 과학혁명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며 science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자연과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아야한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철학자로 분류되는 학자로서 당시 천동설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여 로마교단에 의해 이단아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종교재판소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우리가 잘 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사형은 면하지만 저서는 금서로 지정되었고 평생을 가택 연금 당했다. 물론 두 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학자들이 성서와 종교의 권위에 그릇되게 도전한 죄목으로 사형당하고 처벌을 받았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이들 중에서도 독실한 종교적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고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일례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다소 시적인 구절로 잘 알려진 학자인 파스칼은 실은 자신의 준엄한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데카르트의 ‘더 이상 의심하려야 할 수 없는 방법론’에 따라 이른 결론인 데카르트식 합리론을 끝내 수용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낱 생각하는 갈대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단지 무한한 신 앞에서 자신이 무가치하고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듯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란 표현은 이 발화에서 어느 날 뚝 떼어져 구전되었고, 그 의미는 원 발화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역사를 다 알고 바라보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가 다소 어리석어 보인다면, 이 당시로부터 300년도 더 넘은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더 이상 공개 사형이나 처벌을 당하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종교의 절대적 권위를 신봉하고 모든 교리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여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하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농담이거나 개그 소재라고 생각했는데, 진화론을 하나부터 처음부터 완전히 부정하며 분노에 찬 비난을 쏟아내는 발언들을 나는 꽤 최근에도 목격한 바가 있다.
이 모든 대립과 이해와 시행착오들에서 세월이 충분히 지나면 결과적으로 사실이 드러나고 수용되는 단계에 이르겠지만 한 학자에게서는 통합적 사고로 존재할 수 있었던 종교와 과학이 공공 영역에서는 과격한 대립을 그치지 않고 인명을 살상하기에 이른 역사는 이토록 격렬하고도 길(었)다.
존 로크, 라이프니츠, 파스칼, 데카르트, 뉴턴, 보일 등등 이들 모두가 철학자이자 과학자이자 수학자이다. 나를 포함해서 문/이과로 분리되어 학창시절을 보낸 독자들에겐 그 경계가 여전히 상당히 클 지도 모른다. 나는 물리학과였지만, 가능한 모든 교양수업을 철학과 전공으로 채웠고, (과학)철학을 전공해서 철학과 대학원을 다녔는데, 그때가 20세기 후반이었음에도 늘 신기한 부류로 분류되곤 했다. 결국 개인적 한계로 배운 것들이 잘 통합되어 업적이 되지는 못했지만.
21세기에 만난 이 만화책은 기분이 좋아질만큼이나 재미있 흥미로울 뿐더러 그 장점만큼이나 생각과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대단한 힘 또한 갖고 있다. 올 해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보낼 선물 중 하나는 이 책으로 하려 한다. 모두가 반가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스피노자가 한 것이 맞습니까?
당시 한 학부생이 질문을 했는데 지도교수와 아무리 열심히 뒤져봐도 스피노자 저서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전공이 아니라 그 뒤에 잊고 지나갔지만, 문득 궁금합니다. 국회도서관을 검색해도 자료가 없었는데 마치 전국민이 당연히 다 아는 듯한 신비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자료에 대해 아시는 분은 댓글로 이 기회에 저를 계몽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국교가 지정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넘어 천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종교사업의 민낯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시절을 핑계 삼아 다음 구절을 함께 읽어 보고 싶어 적는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지지나 비난에 의도를 두고 있지는 않다.
성경이 신성한 이유는 단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선지자들은 철학자나 과학가자 아니었고 심지어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이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해 말한 바가 반드시 참은 아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놀라운 덕과 생생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감동적이었지만 내용은 단순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참된 종교의 의미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정의롭고 자비로운 행위를 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것, 기성 종교의 모든 의식과 예배는 신앙심과 아무 관련이 없다. 스피노자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