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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사실 모든 개인은 특정 장소에 대해 다소간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각 개인이 장소를 각기 다른 시공간적 계기를 통해 경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에 색깔을 칠하고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개성, 기억, 감정, 의도를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조합하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시각이 아주 중요한 종합예술인 영화에서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해석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경우들이 있다. 최근 가장 유명한 영화라면 역시 <기생충>이 있다. 지나보니 그렇더라~ 정도의 생각일 뿐이지만, 어째 근래 재난과 지하공간이 등장하는 문화매체들과 코로나19가 창궐한 영화였으면 좋았을 현실!이 뒤섞여 비슷한 모습으로 내 삶에 들어온다. 특히나 이 책은 재난과 지하공간을 모두 소재로 삼아서 읽으면서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훌륭한 창작품인 걸 알지만 순간 르포를 읽는 감정이 차오르기도 했다.
2006년 영화 괴물에서 괴물과 접촉한 이들에게 지나치게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방역복을 입은 직원들은 전혀 현실감이 없었는데, 이젠 화면 속 의료진과 방역직원들의 방역복이 부족하지 않고 안전해야 할 텐데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만 든다. 겨우 14년만이다.
부림지구의 벙커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핵전쟁 시 한시적인 생존을 보장해주는 완벽한 지하아파트같은 벙커가 아니다. 침구도 욕실도 침구도 없는 벌레와 쥐가 들끓는 어두운 공간, 지하에 버려진 관광버스 내부이다. 그리고 소설 속 정부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고 방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견디며 살아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도 죽은 아내의 도움을 받은 그 늙은 운전사처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겠죠.
누군가가 우리를 보호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믿어요. 234
전염병의 영향 아래 있지만 비교적 아직은 안전한 장소에서 단지 가끔 소리를 막 지르고 싶은 갑갑증과 무력증에 빠지는 현실도 당사자에게는 고통이고, 이런 변명에 힘을 싣기 위해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안간힘을 내어 끝날 때까지 편히 쉬는 한순간도 없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지친 얼굴들을 매일 떠올린다고 말한다. 마스크 땜에 힘들 때는 마스크를 너무나 장시간 착용하고 환자들을 돌보느라 상처투성이, 밴드와 붕대투성이가 된 의료진을 떠올려본다. 지금은 저 먼 곳의 달라이 라마보다 더 맑고 깊은 눈빛들을 한 땀벅벅인 그들을.
그제는 마스크 공장에도 자원봉사자들이 달려가 일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해란 무엇인가. 어린아이들 표현대로 정말 지구는 아픈 걸까. 재해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재해가 과연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미 모든 걸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재해 시 사람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까. 297
한 번도 내 이익을 완전히 내어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쩌면 이 시절만이 아니라 평생을 더 노력했던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온 것일 터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면 짜증과 울화로 가득한 못난이에서 지극히 사랑받는 이처럼 마음이 살 풀리고 기운이 조금 난다.
이런 시기에 힘이 되어주는 이들에 대한 자각이 아무리 진심이라 하더라도 결국 질량에 따라 중력이 제각각이듯, 같은 정도로 보답할 일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도 내 일상에서 끝까지 힘껏 버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소소하더라도 함께 할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어젠 손석희/양준일 인터뷰 내용 중에 양준일이 미국에 있는 동안 쓰레기를 계속 버리며 살았다고, 자신 안에 있던 쓰레기를 계속 버렸다고 한 말이 다시 기억났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불리는 격리된 상황을 기회로 안팎으로 버리고 닦고 재정리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이 처음 살아보는 새 날이지만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지금인 것 같다. 정리를 시작하자.
뜻밖에 일어난 재난은 어떤 계급이나 격차를 한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재난과의 동거는 늘 더 어려운 쪽의 몫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해가 나기 전부터도, 지금도, 평생 동안 재해를 앓듯 살아간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모두들 그저 묵묵히 살고 있을 뿐인, 그림자 같은 착한 사람들이 이 소설에 있다. 나는 부림지구라는 허구적 공간 안에서 그들의 조용한 움직임을 따라 다녀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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