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
김성원 지음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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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왜 유일한 희망인지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

연결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

어느덧, 글을 쓰면서 괴롭지 않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모든 것이 변했다.

지나가던 바람이 변하고 산과 들의 향기도 변하고

마음의 어둠은 빛으로 변하였다.

모든 것에 감사하다.

 

무게감이 맞춤하고 표지가 마쉬멜로우처럼 달콤하고, “돕고 싶다, 누군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 닿고 싶다” 말하는 문장들이 저자의 진심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에세이글이다. 자주 멈추며 읽다가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1장으로 돌아왔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현실감을 더하면서 메시지의 깊이를 더하는 장점이 있는 나머지 장들의 내용도 더할 수 없이 마음에 들지만, 저자 자신의 고민과 사유가 더 많이 드러나고 정돈된 1장의 내용을 다시 한 번은 더 찬찬히 읽어 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내가 지나온 시간과 경험과 기억과 교차되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스파이로 그럭저럭 살고 있는데, 이상한 임무가 주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말 어려운 임무였다.

당시 나에게 남아 있던 인류애는 소멸 직전이어서 거의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19

 

아주 오래전 일이기 하지만 화도 많이 나고 실망도 크고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 탓에, 이 따위 세상 다 망해버려라! 진심을 꽉 채워 분노한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상주의가 강한 젊은 날의 막바지에 특히 그랬다. 이후 노력과는 별개로 사는 일이 그다지 깔끔하고 모양새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폭넓게 받아들인 후 그래도 노력하며 사는 우리들과 모두들에게 애틋한 마음이 자라났다. 그런 시절의 마음 한 조각이 이 구절에서 상기되었다.

 

선과 악의 경계는 그리 빡빡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좋은 일을 하게 될 때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의도의 역설이라고 부르겠다. 오래전 절망에 빠졌을 때, 신문기사를 보면서 이런 의도의 역설에 해당하는 사건을 찾는 취미를 개발해냈다.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아무튼 그 취미가 나에게 다시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24

 

지금도 그렇지만 좋은 소식보다 범죄 소식이 잘 팔리는 언론의 속성 상 기사나 보도만 계속 보고 산다면, 왜 다들 자살을 하지 않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절망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다. 언젠가 조금쯤은 진심을 담아 자본금이 모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돕고 선한 일을 하고 자기 희생을 하고 사는지 그런 소식지를 만들자고 친구들과 호언했는데...... 지금은...... 아직 세상이 망하지 않은 건 내가 일일이 사연을 알지 못해도 그런 많은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분명한 증거라서 굳이 소식을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인지, 그 이야기를 술자리에서도 다시 꺼내는 친구가 없다. 어쨌든 희망이 되고 살 이유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보는 것을 언제나 응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우리가 미워하는 타인의 성격이 내가 갖고 있는 인격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누군가를 괜히 미워하게 될 때마다 ‘반갑군, 또 내 자신을 만났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을 인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자아를 발견하는 여행길에서는 자신이 부서지고 말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곤 하니까. 37

 

데미안, 융 심리학, 그림자...... 나의 그림자는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본다. 처음 융 심리학 Jungian Psychology 강의를 들은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이라는 유명한 미국 심리학자가 초대되어 강의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냥 수강을 했던 것이 계기였다. 강렬하고 재미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전에는 심리학이란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는 자연계열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인문학적 가치가 충분히 수업 방식으로 활용되면서 해석도 가능한 인상적인 강의를 듣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아직까지 융의 분석이 다양한 사회분야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어 그것도 반가운 일이다.

 

악의 없이 유쾌한 사람을 만나면 전 인류가 정기적으로 그에게 세계 정신건강 유지에 대한 사례금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47

 

나는 대체로 특정한 부류의 유쾌한 이들을 좋아하는 꽤나 경직된 기호를 갖고 있고, 세월이 누적되고 나니 이 기호가 이젠 순간 처리되는 종합적 판단기준으로 기능을 하는 중이고, 직감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속도로 누군가에 대한 감성적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그 판단을 늘 공표하고 공개적인 태도를 정하고 관련 없는 대상을 존재만으로 비난하거나 괴롭히는 일로 전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불쾌 혹은 불편한 느낌이 드는 이와 친구가 되려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합리화의 영역이긴 해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 다행인 것이 일정 시기가 지나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사적 영역에서는 이런 판단을 거의 맹신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런 판단 태도를 완전히 사적인 것으로 둘 뿐 전도를 하지는 않는다.

 

심리학작 하인츠 코헛 Heinz Kohut은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관계를 통해 진정한 공감을 얻으면 ‘심리적 산소 psychological oxygen’를 공급받는다고 했다. 나는 이 표현을 좋아한다. 51-52

 

일단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는데도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은 이들과의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표현을 이해할 것이다. 질식할 것만 같은 그 갑갑함. 그래서 가끔은 역으로 너에게도 나에게도 2차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훨씬 더 훨씬 편하다. 그러다 드물긴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처럼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존재가 전면적으로 부딪치며 만난 듯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타인을 만나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 희박한 확률의 완벽한 행복이 나머지 대부분의 불행한 시간들을 한 번에 무가치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의 말을 배워서 대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중략. 내 언어를 다른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서 말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성장의 과제였다. 54-55

 

이 미션은 생각보다 참 어렵다. 언어적인 소통인 동시에 비언어적인 소통 역시 한꺼번에 이루어지니까 가령 내 몸짓이 덜 호의적이라든가 시선처리가 미숙했다거나 집중이 덜 했다거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렇다고 나 안할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매년 자신을 돌아봐도 어떤 분야에서도 ‘어른’이 되긴 영 그른 것 같아....... 소통을 잘 하는 이는 한없이 존경스럽다.

 

당신에게 꽃을 준 사람은 그 전에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다. 76

 

내가 배운 것 중에 다른 이들도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이런 호혜의 법칙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를 꼭 나에게 되갚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 언젠가 내어줄 수 있기를. 나는 기억 못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기억하는 것만 해도 무수한 도움을 꼭 필요한 순간들에 받고 살아서 한동안은 행운이네! 우쭐한 기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곱씹어볼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생생해서 제발 내게도 누군가에게 도움과 호의를 베풀 기회를 주세요... 라고 애원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기도 했다. 이는 또한 많은 철학자들이 다른 표현들을 써서 인간 사회의 윤리적 규범을 정하고 싶어 한 핵심 내용이 이것이기도 하다. 아는 구절이 몇 개 있지만 이 표현이 시각적으로 가장 예쁘다.

 

성취감은 짧은 순간에 지나가는 행복과는 다르다. 그것은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는 의지의 확인이며, 인간의 하찮은 발자국이 위대함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다. 중략.

​나아갈 수 있다는 것. 함께 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진 고독한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이다. 78-79

 

우리는 대한민국은 세계는 이런 한 시기를 견디고 있는 듯하다. 사방에서 매일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들려온다. 그러면 또 다급한 마음에 이런저런 도움이 될 계기에 동참하고 싶어 자잘한 개입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견디고 다른 이들이 견디는 모습도 지켜본다.

​분명히 지금도 어렵고 당분간도 어렵겠지만 비열한 정치공학과 매판언론들이 활개 치는 현실에서 이미 더없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인문의 정수와 같은 사고와 행동들을 목격하고 있다.

​행복하지 않은 이 순간, 그래도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래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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