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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수채화 컬러링북 - 새콤달콤 쉽고 즐거운
홍희수 지음 / 밥북 / 2020년 1월
평점 :
별다른 애정없이 학교 행사인 사생대회에 참가하는 반복되는 일정 정도로만 생각한 초등학교 시절 수채화 그리는 시기를 지나, 중학교 입학 후 의지와 상관없이 미술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업 중 데생 후 선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나가는 방식이 좋은 편이라고 선생이 추천을 받았다. 기쁘기보다는 어리둥절해서 꿈꾸지 않고 동경하지 않았던 부활동을 하게 되었는데도 무척 열심히 참가하였다.
무엇보다 점심 시간에 간단한 스케치 활동을 한다는 폼나는 이유로 그때도 지금도 좋아하지 않은 수다떨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일년이 흘러 꽤나 스케치 스킬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어느날 유달리 맘에 드는 그 오후의 풍경 앞에서 늘 그렇듯 간단하 스케치를 하려고 하는데,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반 아이가 옆에 와서 "넌 저런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니? 난 사진을 찍어 두고 싶고, 내 친구는 글을 쓰고 싶대."라는 말을 건네준 것을 화두로 삼아 며칠 진지하게 고민하다, 나는 딱히 아름다운 것, 마음에 드는 것을 목격한다고 해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지를 솔직하게 받아 들이고 미술부를 탈퇴하였다.
그후 전혀 미술부 활동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과 미래의 삶을 연결지어 마음을 다하는 친구들 틈에서 나도 비슷한 부류인 듯 말없이 앉아 굳이 부정하지 않는 것이 마치 참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엿보러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계면쩍음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아 마음이 가벼웠다.
그 시절이 계기가 된 것인지 아님 굳이 이유를 찾이 않더라도 내 취향이 그랬을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세상 모든 색상들을 경애하고 경외한다. 어떻게 이런! 이 요즘도 새로 과일을 사게 되면 그 중 어여쁜 하나를 빤히 바라보며 늘 드는 생각이다. 그것은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무지개를 포함 모든 아름다운 색상들의 태생과 본질을 알게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랫만에 온 집을 뒤져서 찾아낸 수채화 그림도구들을 늘어놓고 종이를 쓰다듬으며 물과 색료의 향을 느끼며 붓을 잡는 일은 즐거운 일은 넘어서 경건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그 시절의 나를 단숨에 소환하는 마법의 시간.
비록 내가 딸기와 한라봉을 전혀 표현할 능력이 없고 - 딸기는 늘 썩기 직전처럼 한라봉은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 바로 옆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를 해도 맞는 색을 찾아낼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절망적일만큼 전혀 그릴 수 없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어 평생 복숭아를 먹지 않았고 그래서 맛을 모를 뿐더러 간혹 목격하게 되어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복숭아라고 쓰고 있는 이 순간도 팔의 어느 언저리가 가려워지는 듯 하기도 한다.
한참을 고군분투하다 다시 색상표를 들여다본다. 비록 내가 가장 사랑하는 로열블루는 없지만 이토록 눈 앞이 반짝이는 기분이 드는 건 참 신기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마치 한동안 빛을 못보고 살았던 것처럼.
대상이 무엇이든 혹시 집 안에 묵혀둔 수채화 재료들이 있다면 그냥 물과 섞어 색들을 죽죽 펼치고 겹쳐보길 바란다. 마음에 물감이 번지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게 알록달록하면서 투명한 기분이 정말 대단한 위로와 기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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