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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맛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 카페, 레스토랑, 빵집, 디저트까지 세계의 미식을 만나다
장완정 지음 / 밥북 / 2019년 10월
평점 :
여러모로 대단하신 저자!
60여 개국을 방문하고 열 두 나라를 엄선하여 만든 미식과 문화 이야기.
책을 펼치자 첫 번째 내용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뉴욕 카페> 이야기가 나와서 눈물이 왈칵 고인다(추억에 더해진 노화와 호르몬의 친화 과정일까).
“비 오네요.” “비 그쳤네요.” “비 또 오네요.” 매일 이어지는 예의 바르고 무의미한 대화에 신물이 나고, 한 겨울에도 파아랗게 생존하는 잔디의 생경함과 신선함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영국의 우울한 일상에 진절머리가 나는 겨울이었다. 첫 해에는 영국인들이 하루에 섭취하는 알코올과 초콜릿 양에 놀라 이 중독자들 뭔가 싶었는데, 날씨에 관한 한 못지않게 우울하고 지루하고 한기를 뿜으면서도 건물 내부는 건조한 참 불편한 기후에 살다 보면, 어느새 초콜릿과 알코올에 손을 뻗게 된다(확인한 공식 연구 자료나 근거는 없지만 기후 덕에 문학과 음악이 광범위하게 계발되었을 거란 의심이...... 자주 밖에 나가서 뭘 할 수가 없다. 운이 나쁘면 갑작스레 쏟아지는 주먹만 한 우박에 맞아 사망할 수도...... 우산도 비바람에 서너 번 찢어 먹다 보면 어느새 더 이상 안 사고 태연하게 안 쓰게 된다. 나의 최초의 낮술도 이런 날이었다. 우박이 뭘 다 때려 부수는 소릴 들으며 3시에 이미 깜깜한 실내를 벽난로 불로 밝히고 한 잔 두 잔.....).
지내던 학교의 기숙사는 온갖 알러지별 선택 메뉴와 베지테리언과 비건 메뉴도 구비되어 있었고(주방 셰프의 스트레스 지수가 매일 극한까지 올랐지만 우리는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했다. 그 와중에 초청 교수 한분은 생식 다이어트를! 필수재료 베이비 코코넛을 갑자기 어디서 구하냐는 비명이 다이닝 홀에 울려 퍼지던......), 식재료 자체가 친환경 유기농이라 확실히 장수할 듯이 건강하고 다채로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점점 더 우울을 더해가는 날씨를 이겨낼 만큼 위로가 될 (내 기준에서)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매일 갑갑증이 더해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을 떠나 “진짜 날씨(real weather, 뭐라 번역해야할지 솔직히 모르겠다)”가 있는 곳으로 그냥 무작정 떠나고 싶어서 구름이 스모그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던 어느 날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한 겨울에 더 춥고 눈 많은 동유럽으로 왜 가는 거냐는 동기들과 친구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이것저것 지긋지긋한 영국을 떠나 도버해협을 건너니 마음이 막 가벼워졌다.
급히 인터넷 예약을 한 ‘붇다’ 지역의 숙소로 가서 짐을 내리고 눈이 잔뜩 덮인 상큼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총총 걸어서 ‘페스트’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체감상 백만 년 만에 겨울과 가장 어울리는 그냥 여기 머물다 세상 뜨고 싶게 설레는 장소에서 못지않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식사를 했다. 그곳이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 부다페스트의 ‘뉴욕카페’이다. 저자가 이 카페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흠칫’이라고 적은 표현이 정말 흥미롭다. 내 경험은 ‘화들짝’이란 느낌에 더 가까웠지만, 공통된 점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제어할 틈도 없이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박물관인지 전시관인지 호텔인지 카페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운 장소이고 실은 이 모든 것이 종합예술처럼 복원되어 완벽하게 조화로운 장소이기도 하다. 주문을 하고 나면 마치 관람료 무료인 전시회에 초대받은 기분으로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저자가 미식만이 아니라 문화 여행의 내용을 선별해서 담아 둔 의도에 잘 맞게 이곳은 헝가리의 대표적인 케익 셀렉션과 커피를 마시는 카페이면서 19세기의 벨 에포크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플랫폼이자 종착역이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미식 여행에 영국식 애프터눈 티와 크림 티가 나와 흠칫&화들짝 놀랐다. (영국과 미식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어색한 조합도 있나 싶지만, 맛이란 그야말로 개별적인 취향이니 이런 인식 또한 나의 개인적인 원한(?!)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맛있는 영국 레스토랑을 알려 달라고 하면, 나는 아직도 주저 없이 OO 타이레스토랑을 권한다.) 크림 티의 본산인 데본에서 오래 살았고 옆 동네(?!) 콘월을 들락거리며 현지조사여행(field trip)을 한 나로서는 크림티만 떠올려도 피곤과 목마름이 동반 연상되지만, 그렇다고 샌드위치와 스콘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고된 시간들에 짧은 휴식과 열량을 충실하게 제공했던 담백하고 든든한 샌드위치와 스콘 또한 지역에 따라 조리법에 따라 먹는 방법에 따라 즐겁고 행복한 훌륭한 식사이다. 크림이 먼저인지 잼이 먼저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소소한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흔한 재료이지만 아마 한국에서는 적어도 판매하지는 않을 듯한 영국식 오이 샌드위치도 한번쯤 추천하고 싶다. 생오이 향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빵 사이에 당당히 단일 재료로 들어간 오이의 모습에 순수하게 진심으로 놀랐지만, 특히 고령층 영국인들이 설탕 가득 티와 생오이버터 샌드위치를 어떻게 즐기게 되었는지 유래를 듣는 것도 잔잔한 재미이다.
다음은 소소하고 잔잔한 영국이야기와 대비되는 황홀한 프랑스 빵, 바게트 이야기이다. 워낙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당시에는 물가도 훨씬 싼 터라 기회만 있으면 빠ㅎ리에서 지내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센강 근처에 세모난 공간의 플랏(flat, 아파트?)을 임대해서 머무는 내내 매일 산책을 다녔다. 미술관을 가든, 카페 거리를 가든, 중고 서점을 가든 시간은 빠르고 아쉽게 지나갔다. 당시는 꽤 엄격한 채식주의자라서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채소 일색의 오믈렛이 거의 유일했지만 전혀 섭섭하지도 부러울 것도 없었던 것은 바로 프렌치 브레드, 빠ㅎ리의 바게트 덕분이었다. 밀가루, 물, 이스트 소금만으로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다니! ‘전통’ 바게트를 드실 기회가 없었던 분들은 제가 완전 헛소리를 한다고 하셔도 드릴 말은 없지만, 기회가 있다면 꼭 제발 반드시 ‘전통’ 바게트를 드셔 보시길 바란다. 정말 딱 이 네 가지 재료로만 구워낸 바게트인데 심지어 향기도 취할 듯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하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바게트가 입에 닿는 순간부터 최초 3초 정도는 의식을 잃게 된다. 늘 간도 딱 맞게 구워져서 다른 부재료가 필요 없지만, 가끔은 실험(?!) 삼아 토마토나 치즈나 올리브를 곁들여 먹는 것도 별미이다. 세계적인 미식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소개하는 부분에 저자가 왜 바게트 얘기만 끝까지 하고 마쳤는지 아무런 불만 없이 완전히 이해한다. 수상 경력이 즐비한 베이커리뿐만이 아니라 루브르 뒷골목이나 강변 중고노점상들 근처에 멈춰 서서 무심히 하나 사먹어도 하나같이 맛있던 빵! 혼자만의 뻥이 아니라 빠ㅎ리 여행을 하는 친구들에게 실험(?!)해본 결과 검증이 잘 된 사실이다. 그러니 빠ㅎ리에서 길 가다 눈에 띄는 아무 베이커리에서 빵을 주문하게 될 경우에도 두려워 마시라. 덕분에 영국에 돌아 온 후로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서럽고 속상한 마음이 한동안 들었다. 물론 더욱 슬픈 일은 한국에 산재한 ‘파리바게트’의...... ‘파리크라상’의 바게트가 조금, 아주 조금 더 바게트 비슷한 맛이 난다......
다른 국가의 다른 맛있는 베이커리 이야기들이 내용 가득이다. 어지럽도록 맛있는 향이 가득한 빵집에서 메뉴를 고르기 직전처럼 보기에 참 행복한 글과 사진으로 채워진 책이다.
4장에서는 내게 참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트러플’ 이야기가 나와 열심히 읽었다. 나는 커리의 향신료를 포함해서 강렬하다고 하는 향이 포함된 음식들에 거부감이 전혀 없고 발효 청국장부터 소위 양말 악취가 난다는 치즈까지 절대 못 먹겠단 생각이 든 적이 없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식재료, 화이트 트러플 오일을 빼고. 대단한 미식가여서 미식 재료들을 찾아 챙겨 먹는 건 절대 아니며, 진정한 미식은 쉽고 일반적인 제철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 먹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희귀하거나 고가의 재료에 관심이 있지도 않다. 그저 경로를 정확히는 모르나, 내게 도달한 화이트 트러플과 오일, 재료가 담긴 포장과 예술적인 유리병과 속재료 중 뭐가 더 비쌀까 싶은 낯선 식재료를, 이왕 생겼으니 매뉴얼대로 가열도 하지 말고 살짝! 그 대단하다는 풍미와 향을 느껴보자 했는데...... 그토록 깊고 진하고 쾌적하고 풍미가 남다르다는 재료 앞에서 철저히 거부당했다. 비염 알러지가 있기는 하지만 급성악화로 향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참을 수 없이 역했다. 생전 처음 식재료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적어도 트러플 중독으로 파산할 일은 없다는 어쩐지 쓸쓸한 위안도 들지만 왜 이런 것인가... 궁금하기 그지없다. 이 책에 쓰인 내용으로는 의문이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트러플을 만나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과 이야기만 가득하니 말이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알러지도 아니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역해서 섭취 불가능했던, 남들은 죄다 황홀하다고 하는 식재료라 정말 진심으로 궁금하다. 트러플 버섯이 체외 분비성 물질 페로몬은 분비한다고 하는데, 인간은 탐지가 불가능하고 돼지만 강렬하게 반응한다는데, 인간과 돼지 간에 유전자나 장기 교환도 하는 마당에(인간의 의료복지를 위해 행해지는 동물실험의 잔인함과 정당성을 미화하거나 희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어쩐지 나만 인간으로부터도 돼지로부터도 소외되는 기분에 두 배로 쓸쓸하다.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로 끝낼 책이 아닌데...... 최근 금전 뒷거래로 인해 권위도 신뢰도 잃어버린 미슐렝 관련 이야기는 건너뛰고 싶다 하더라도 저자가 엄선한 12나라의 달콤한 이야기들과 막강 셰프들과 진정한 장인들과 먹방만이 아니라 관련된 전통과 역사를 품어 한층 더 넓어진 유럽의 미식의 세계는 더할 수 없이 흥미롭고 감칠맛이 가득하다.
차오르는 침을 삼키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까마득히 잊혀졌던, 친구네 고향마을, 피치니스코에서 로마로 향하던 어느 구불구불 산길에서 만난 한산한 레스토랑에서 내어 주던 따끈한 콩스프의 충격적인 맛이 다시 떠오른다. 맛있는 콩스프 따윈 세상에 절대 존재할리 없을 거라 확신하며 산 세월을 한 번에 날려 주던, 멈추지 못하고 마셨던 한 그릇. 저자처럼 유럽에서 틈틈이 나도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세상에 맛있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결국은 베이커리가 아니라 콩스프 얘기로 마무리.....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