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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답이 없는 것이 위계적인 사회생활의 고단함과 상사와의 관계이다. 실제로 스타트업에서 호칭은 거의 두 가지 방식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모두에게 ‘님’을 붙여 존칭을 사용하는 방법, 두 번째는 존칭이 따로 없다고 여겨지는 영어 이름이라 한다. 회사마다 결과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실질적인 관계가 평등하게 변한다기보다는 이름만 부르고 존칭을 생략하는 경우 연장자가 말을 놓기에 더 쉽다는 점을 드러낸다. 열심히 유행을 따라가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직급 대신 이름을, 영어이름을 쓴다는 것만으로 평등한 관계 개선에 어떻게 변화를 가져오겠는가.
아이디어도 좋고 꿈도 크고 이익 창출을 위한 노력과 열의를 다하는 회의를 이어가는 개발자들이 다니는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현실과 혼동될 만큼 섬세하고 흔한 모습들에 공감이 크게 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디테일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그 중 어느 하나의 아이디어라도 회사의 대표가 시큰둥해하는 때이다. 구체적이고 정당한 잘못이라는 설명도 근거도 없이 패널티를 부가한다든가, 대표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과 감정적인 반응을 적극적으로 피력함으로써 직원들에게 부담을 주고, 그 결과 수긍이 가는 대안이 아니라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 그나마 웃고 지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구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이 생생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사람들이 포인트를 그렇게 좋아하나?”
“네! 좋아합니다!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중략.
“그렇게 좋은 거면 앞으로 일 년 동안 이차장은 월급, 포인트로 받게.” 중략.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나요?” 중략.
이 에피소드는 농담이 아니며, 놀라운 일은 이 정도는 작은 규모의 사건이라는 거였다. 십년 내내 구전되는 더한 사건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출퇴근이 힘들어도 회사와 집은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은 나와 주변의 경험으로만 봐도 몇 십 년째 유지되고 있다. 실제 공간 거리보다는 회사에서의 나와 사생활의 나를 가능한 분리시키고 싶은 심정의 발로라 생각한다.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수많은 갈등이야 매일 다반사이지만 더 힘든 것은 그 갈등의 발생과 처리가 부조리하다는 것에 있다. 더욱 심각한 상황은 분명히 부조리한 일들임에도 널리 퍼져 오래되면 부조리한 것이 아니게 되고, 누군가 그 부분을 지적하는 순간, 월급 노예에 비견한 처지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세대가 다르긴 하지만 실직이란 언제나 공포이며, 이는 밀레니엄 세대라 불리는 이 소설의 20, 30대 인물들에게는 더 큰 고통과 슬픔이다.
그래서 가능한 주변에는 눈을 감고 업무에만 집중해서 성과를 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내가 한 업무와 나 자신이 동일시되고 그런 순간부터 스트레스는 급상승하기 마련이라, 만성화된 경우 크고 작은 정신질환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제대로 인지되지 않고 개인의 성격이나 환경으로 환원되는 일도 다반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나가고 가능한 많은 위안과 기쁨이 되는 일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생명력이 강한 이들이 있는데, 안타까운 일은 실제로 ‘제대로 된 취미생활’이란 이미 확보할 여유가 있는 상급자들만 누리는 호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해당 상급자들이 업무만이 아니라 자신의 취미생활 또한 직원들에게 강요하는 경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가 있다. 이야기든 현실이든 회사인간,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온전한 자신을 지켜내는 미션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생존기가 된다.
“내가 회사 생활 십오 년 하면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중략.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그나마 호러 스릴러 뺨치는 장면들이 끝까지 등장하지 않아 다행인 직장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취업대란이란 표현이 흔해진 사회이니만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정규직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부러움과 안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면면들은 신입일 때의 자책과 자괴감과, 실수를 부르는 경력직의 오만함과, 개발자로서의 죽을 듯한 고민들과, 더 많은 경력을 쌓아가기 위한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는 일과, 급기야는 삶을 갈아 넣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력한 위기감을 느끼는 일로 이어지는 일도 낯설지 않다.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안정과 운이 좋은 경우 자아실현을 위한 적소로서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거나 포기하면서 느끼는 심신의 고통과 슬픔, 아픔이 거의 언제나 막상막하인 경우들이 부지기이다. 그런 점에서 직업으로서의 ‘일’이란 그야말로 기쁨과 슬픔의 공존활동이며, 바로 이 지점이 작가가 자세히 들여다보고 환하게 그린 듯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글 자체가 늘 고구마 씹는 답답한 분위기는 아니고 가독성을 보장할 만큼 한편 놀랍고도 통쾌하게 코믹하고 명랑하고 활기차기도 하다.
곱씹어 볼수록 직급이 의미 없을 만큼 모두가 고단하고 안쓰러운 인물들을 담백하고 경쾌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현실 사무실과 현실 직장인들의 모습이 제대로 녹아들어 있는 단편이라, 건더기 식사를 도저히 씹어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날, 혈당량을 끌어 올려줄 입에 짝 붙는 음료수 한 잔과 단편 하나로 잠시 시간을 보내며 지친 나를 쉬어가게 하는 일에 적격이라는 생각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삶이 극적으로 나아지리라는 꿈같은 건 아무도 꾸지 않는 시대, 그렇다고 완전한 절망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 상처받고 시달리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일상을 견디는 회사 인간들, 그리고 우리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담백한 내용들이 구구절절 가득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