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과 정의 -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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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생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와 한국전쟁과 이승만 정권과 유신독재와 군부독재와 문민정부를 다 목격하고 귀천하신 조부모님들께, 이제는 조손인 나도 못지않은 격동과 격랑의 세월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고 말씀 올려도 될 듯한 기분이 든다. 병리적이고 억압적인 구조의 말로로서 당연하고 필연적인 흐름이겠지만,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이 단출한 단일 사건인양 보일 정도로 얼마 전부터(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되겠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적폐와 병폐들이 죄다 드러나기 시작"하는 분위기이다. 어느 한 구석 온전히 맑고 반듯한 곳이 없다. 적발로 갑작스럽게 노출된 퀴퀴하고 음습한 부분들이 마치 볕에 타들어가는 병증 환자의 비명처럼 스스로의 초조와 불안과 공포심을 날카롭고 무자비한 무기들로 바꿔 휘두르는 모습이다.

 

군주의 덕목이란 ‘필요에 따라 선악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적혀 있는 마키아벨리즘은 너무 많은 이들이 인용하고 배우지 않고도 잘만 추종해서 구태여 나까지 성실하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권력을 얻는 유일한 길이 기만과 계산과 조작에 있다고 믿는 한국의 정치인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그 면면을 보면, 그러한 동력이 인정과 평가 욕구라기보다는 타인에게 권력을 자의적으로 남용할 때 느끼는 쾌락과 본인들이 현재 가진 권력으로 누릴 수 있는 다른 권력으로의 확장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검사란 직업은 최고로 짜릿하고 흥미로운 직업군이다. 검찰은 수사를 할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고, 기소를 할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고, 구속을 할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고, 구형을 하려면 얼마를 할지도 결정할 수 있고, 재판 후에 형 집행을 어떻게 할지도 결정할 수 있고, 이 모든 권한을 다 가지고 있는 거니까.

 

게다가 전관 오면 사건 봐주는 행위에 대해 아무런, 정말 아무런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듯하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에도 자신들이 99%는 제대로 하고 1% 정도 외압이 들어오거나 선배가 부탁하면 봐주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공정’이란 개념 자체의 부재와 엄청난 자기 합리화가 조직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형국이다. 영장 한번 꺾어 주고(?!) 몇 억씩 보장받는 살맛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검찰총장 직속의 무슨 무슨 권한실조 위원회들 몇 개 만들고 개혁의 얼굴을 하지는 말길 바란다. 시민독자인 내게 떠오르는 개혁할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도 1. 기소독점 2. 수사지휘 3. 공판 4. 현직 검사 비리 외부 감찰 5. 공수처 분리 6. 자격 정년제 7. 전관예우금지 정도는 된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개처럼 산다 혹은 일을 개같이 한다’라고 하면 마땅히 모욕감을 느끼고 그러한 비하 표현(개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단지 인간 사회에서 개의 비유를 통해 인간을 비하하는 그 표현 지점을 말하고자 한다)의 저급함과 성급함을 지적하며 억울한 부분을 밝히는 것이 당연한데, 스스로 “우리는 개다. 물라고 하면 물고 물지 말라고 하면 물지 않는다.”고 한 발언은 여러 가지로 섬뜩하고 위험한 냄새가 난다. 판단력과 사고력과 직업윤리의 부재 혹은 그런 것들은 1도 염두에 두지 않는 합법적 범죄자다운 대범함,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교묘한 회피 의식과 발 빼기는 빼먹지 않는, 여러모로 문제가 심각한 발언이라 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입마개와 목줄이 느슨해지자마자 충견답게 명령을 기다리는 대신 물라는 명령 없이도 알아서 물고 싶은 건 물었고 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통해 누구를 물어야 하는가를 주인에게 몸소 가르치려 들었다.

 

개의 정치적 입장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늘공(직업 공무원)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전투‘는 늘 늘공의 승리로 끝난다.’ (임은정 검사). 현직 검사가 단호하게 재검증해주니 알고는 있었지만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던 현실을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쳐다봐야 하는구나 싶은 실감이 든다. 대한민국의 ‘관료마피아’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각국의 마피아보다 더 대단한 결속력과 응집력을 가지고 결정적일 때마다 실패 없는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국민들이 있을까 싶은 세월이 이미 오래다.

 

특히나 근래에 <대한민국 검사집단이 사는 법, ‘칼이란 이렇게 휘두르는 것이다!’>란 다큐를 거의 매일 실시간으로 소름끼치게 목격했으며, “찍히면 다 죽는다!”를 충실하게 보여 준 숨 가쁜 표적수사와 화력 집중 쇼 덕택에, 경멸하는 전직 대법원장의 적법한 처벌을 고대하는 한편, 존경하는 또 다른 전직대법관이자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사법농단과 사법개혁’의 길 위에서 자꾸만 생각이 벗어나는 것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어느 새 머릿속엔 도검난무 화려한 검찰개혁에 대한 당위성과 절실함이 커져만 갔다.

 

김영란 전대법관이 “판사생활 동안 ‘사건에는 정답이 있고 판결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대법원에 와보니 판결은 선택이 되기도 했다.”고 한 ‘용감한’ 고백(거의 대부분의 유책인들이 잘못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현실에서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존경한다.)은 검찰의 노골적이고 거칠 것 없이 자유분방한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정의’의 막강 행보에 짓밟혀 어느 카페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느껴질 정도이다.

 

임은정 검사가 ‘개별 전투’에서는 질지라도 결국 ‘전쟁’에서는 시대정신을 담은 행보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 위로를 건네지만, ‘일치단결한 프로 칼잡이들’을 외부에서 개혁시킬 동력 약세와 ‘칼잡이들의 갑작스런 자기반성과 자체개혁’이란 망상스런 기대 사이에서 희망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알아서 미리 패배한 겁쟁이일 뿐인가. 내가 영원히 틀리고 임은정 검사의 확신이 모두가 볼 수 있는 불꽃처럼 명약관화 불타오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법의 본성은 기존 질서를 지켜나가려는 데 있으므로 계층화된 사회질서 또한 지켜나가려 할 것이다. 22

 

때로 형식적 평등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쪽을 유리하게 보호하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111

 

삼성 엑스파일 사건 판결의 다수 의견이 정당행위의 해석을 종래의 해석보다 훨씬 더 좁혀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선택인데도 그 결론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 노회찬 의원만이 지게 되었다. 200

 

정치적 판결이 다루는 문제는 대법원의 전원합의체가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정치적이고 정책적이어서 '민주적 공론의 장'에서 깊이 있게 토론되도록 하는 길을 찾아야 하는 문제들이다. 217

 

판사들이 큰 그림을 가지고 결론을 선택한다는 것은 원래 사법부가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들을 분석하여 보면 어떤 성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중략. 그렇다면 입법을 하는 경우뿐 아니라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세계의 미래와 법의 미래를 생각해 보고 상상해 보는 일들은 필요하다. 생각과 상상을 그치고 주어진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계산된 알고리즘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226

 

시종여일 독보적으로 어조가 차분해서 설득력과 신뢰도가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는 전대법관 김영란님의 글 [판결과 정의], 혼자 읽고 고민하기엔 너무 크고 복잡한 정치/사회관계를 다루는 주제이니, 책모임이나 토론모임이 생기고 공론화되는 과정을 거쳐 [김영란법]처럼 법률 정책화할 수 있을 정도로 곱게 다듬어지길 진심으로 고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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