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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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성함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본 책이 없어서 혼자 당황했다. 최근 [은주의 영화]를 읽은 친구의 추천으로 덕분에 드디어 읽게 되었다. 무겁고 아프고 서글픈 세월을 살아가는 이야기 8편이다. 읽다 보면, 우리는 늘 사는 일이 이토록 불안하고, 시절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상처는 깊어가고, 나이가 드는 일은 외롭고 쓸쓸한 일일 수밖에 없나 하는 서러운 생각이 절로 든다. 등장인물들은 폭력과 상처에도 말 못하고 숨죽여 살다가 어떤 계기로 소리 지르고 울고 노래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다 알아 듣지 못할 전남사투리가 판소리 가락처럼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각각의 단편들은 하나의 인물이나 일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작가가 살아 온 세대와 사회를 교차하여 위로의 말을 보내고 있다. 5.18이 보이고, 1989년 조선대 학생 이철규 의문사, 평택 쌍용자동차, 가족의 해체, 세대가 지나도 대물림되는 고달픈 삶,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이렇게 반복되는 불행들이 가득한 현실에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한편 작가는 이런 슬픔과 불행에만 머무르지 않고 [은주의 영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느낀 것처럼 당사자 세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소통과 행동을 제안하는 것으로 읽힌다.

 

늘 되풀이되는 깨달음이 이번에도 아프다. 사적인 일상을 일부 희생하면서 사회문제에 직접적으로 나서서 행동하진 못하고, 지난하고 힘겨운 싸움일 줄 알지만 큰 권력 앞에 힘들게 투쟁하는 단체나 대신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는 곳에 그저 정기후원을 하는 정도로 면죄부를 주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치 그 행위만으로 적당히 무관심하게 일상을 보내면서. 큰 사건의 직접 피해자들도 안타깝고, 주변에서 소외되는 이들도 아프다. 언젠가는 소설 밖의 현실과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언제나 맴돈다.

 

이 소설들이 지금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 가닿아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까. 말을 걸 수나 있을까?

​혹은 누가 이 소설들에 말을 걸어오기나 할까?

​소설이라는 물건이 세상에 의미가 있기는 할까?

​나는 혹시 노래를 익혀 ‘밤무대 가수’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존재 의의’로서는 좀 더 윗길이지 않았을까?

​소설이 세상에서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은 소설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공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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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런 길모퉁이에서 파란 제복을 입고 호각을 불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길을 건너오던 너희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가더라. 예뻐서 호각 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희 어마가 한 번 더 돌아볼까 봐, 가슴을 졸였지. 정말로 돌아보더라. 숨이 멈을 뻔했지.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했던 순간이 내 영화의 시작이었다. 74

 

"아따, 그런 말 하지들 마쑈, 저 아래 누구 집, 누구 집 해서 죽은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디. 우리 집 가시내는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단지 달구새끼 때문에 충격을 좀 먹은 것을 가지고 무슨 피해자는 피해자여…." 79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이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 83

 

"군인들이 너한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등신처럼 구냐고요, 가시내야아." 92

 

울지 말라고 했건만, 카메라 밖에서 엄마가 울다가 악을 쓴다. 미친 가시내야, 아니 은주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밖으로 나오너라.(중략) 언니 땜에 엄마가 죽고 싶다고 난리잖아 지그음. 누구는 밤새 알바하고 왔는데 누구는 골방에 처박혀서 사람 미치게 하고 엄마는 죽고 싶다 난리고 아빠는 아픈 몸에 술만 마시고오, 나만, 나만 살아보겠다고 이 고생을 왜 해야 하냐고오. 100

 

말 들어보니 그날 밤에 대학생 한 명이 검문에 걸려 쫓기고 있었다등만. 이 어린애가 저 잡을라고 쫓아온 사람들인 줄 알고 그 밤에 쫓기다가 어이없이 사고를 당한 거여. (중략) 그렇게 그날 밤에 이 산에서 두 놈이 쫓기다가 죽은 것이여. 두 놈 다 자기만 쫓아오는 줄 알았겄제이. 129

 

시내에서 학생들이 철규를 살려내라,고 데모를 해. 우리 철규를 왜 살려내라고 하나, 왜 그러느냐고 우리 철규를 당신들이 아냐고, 왈칵 물었지. 대학생들도 울어. 울면서 나한테 물어. 이철규 누냐냐고. 아니라고, 나는 박철규 에미라고 했지. 129

 

오랫동안, 철규는 카메라 밖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 단단해서, 뭐라고 말을 붙여볼 수조차 없는 그런 침묵이었다. 오랜 침묵의 뒤에 소년 철규는 카메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영화가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135

 

이런저런 생각들이 간단없이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이 애가 잘 살고 있는지,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제 남편하고도 상관없는,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깊은 곳, 제 몸속 어딘가, 저만이 알고 있는 우물 같은 장소에 웅크린 딱딱한 것, 그것을 굳이 슬픔이라거나 그늘이라고 하면 좀 민망해질 수도 있을, 그런 것이 딸에게도 있을 것이다, 왜 없겠는가, 사람의 자식인데… 153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별과 별 사이가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거 아니냐, 사람 사이처럼 말이지." 157

 

나의 염소 가족들은 언제쯤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을까. 한 마리도 빠짐없이 다 함께 모여서 어느 햇빛 가득한 봄날이거나 햇빛이 만들어낸 그늘이 싱그러운 여름날의 언덕에서 향긋한 식사를 즐길 수 있을까. 162

 

“맞소, 우린 사측의 개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피로와 슬픔과 분노가 서려 있기는 쇠철문 바깥 사람들이나 안 사람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해가 저물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진 아수라를 구경하러 나온 공장 인근 마을 개들이 저물어오는 벌판을 동네 양아치들처럼 몰려다녔다.(중략) “나도 배고픈데 울 아빠도 디게 목마르고 배고프겠다.”“사는 기 이케 서룹다.” 185~186

 

"나는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들은 내 속에서 통통하게 살이 찔 것이고 배가 고프면 내 말들을 먹을 것이다." 191

 

옛날은 내게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선명한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사람이 ‘시낭고낭’ 앓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시작한 이야기가 [은주의 영화]다. [은주의 영화]는 언젠가 또 다른 이야기를 내게 데려다 주리라. 어쩌면 문 앞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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