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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에 왜 그래?
기울어진 세상에서 평등을 찾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
어떻게 이런 대단한 제목이 나올 수 있을까. 그야말로 벤젠 고리 구조 발견 못지않은 직관과 통찰을 담은 제목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가하는 차별을 겪은 경험이 없는 선계의 인간들은 이해 못할 감동이겠으나,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의 열패감에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드는 나로서는, 내용을 읽기도 전에 최고의 대변인이자 변호인이자 상담사를 만난 것과 맞먹는 감동적인 조우일 거라 믿어 마지않았다.
순전히 운이 좋아서, 거대한 차별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선량한 이들’이 ‘재밌자고’ ‘(지들만) 좋은 게 좋다고’ 무분별하고 사려 없이 쏟아내는 발화들에, 뒷목 잡기부터 이불 킥까지, 혹은 상당한 분노와 짜증이 솟구치는 경우들이 부지기수이다. 더욱 곤란한 경우는, 그 행위자가 ‘정말 좋은 사람’일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경건하게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로 살 수도 없는 나로서는, 일상의 분노들이 쌓여가다 도무지 그럴 일이 아닌 일에도 기어코 짜증과 화를 내고 마는...... 찌질한 인간이 되는 스스로를 지켜봐야 하는 2차 고통도 겪어야 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아 온 그런 저런 하소연을 떠올리며, 일상화되고 교묘한 차별들의 정체를 저자가 선명하게 밝히고 확실히 부셔버리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리란 기대를 하며 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억울함에 공감해줄 내 편을 얻는 대신,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결코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한 분야에서 나 자신이 차별주의자란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몇 년 전부터 얼마 전까지도 ‘벙어리장갑’이란 표현을 쓰지 말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대한 우아하고 상냥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몇 번인가 별 것 아닌 옵션들 앞에서도 매번 결정을 고민하는 나 자신을 자조하며 다그치듯 ‘결정장애’인가봐, 라고 말했다.
난...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유사한 경험을 한 이 책의 저자처럼, 나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생각과 발화를 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살았다고? 세계인권선언과 헌법이 각 가정의 필수품으로 보급되고야 한다고 믿고, ‘equity’와 ‘equality’를 공들여 구분하는 글을 쓰면서 평등이 확대되는 역사의 진보를 믿고, 인권영화제관련 일을 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인권관련 통/번역과 해외출장, 다큐멘터리 작업을 숫자로 환원되는 이해관계를 떠나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고, 뇌병변 장애 친척의 상황을 인지하고 가능한 도움이 되고자 애쓴 그 세월 동안, 내가 실은 장애인 차별주의자로 살아온 거라고?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6
인생을 탈탈 털어, 비소설 부문에서, 그것도 프롤로그 도입 부분에서 이토록 결정적이고 묵직한 한 방을 날려준 책은 없었다. 저자는 유사한 그 경험 이후 ‘연구’를 충실히 진행하여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덕에 적어도 간신히 앞으로는 ‘결정장애’란 말을 남발하는 장애인 차별주의자로 살지는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에 관련된 사건과 논쟁을 주요하게 담았지만, ‘어떤 사람이 소수자로 위치 지어지는 이유는 - 나이, 학력, 직업, 출신 지역, 경제적 수준, 가족상황, 건강상태 등 - 무수히 많다’고 경고한다(12). 나는 예상치 못하게 너무 일찍 아픈 충격과 반성의 시간을 가져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에게서 또 다른 차별주의자의 모습을 얼마나 더 발견하든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왜 나는 순수 무결하게 아무도 차별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 없고 오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시작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 위안은, ‘기쁜 우리 젊은 날’에 내가 믿었던 것이 ‘가설’에 불과하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 ‘함정’과 같은 구덩이에 웃으며 걸어 들어갔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이 가설이 가치라곤 없는 것이라 통렬히 비판하고 버리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아마 평생 이 가설을 포기하지도 않고 언젠가! 반드시! 이런 유의 희망을 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유의 인간이다.
단지 이제야 어렴풋이 정리되고 이해되는 것 중 하나는, 오랜 유학을 떠나기 전 여러 시민운동에 동조하고 참여했는데, 주변에 온통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뿐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흔히 말하듯 젊음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많은 이들의 많은 노력들이 이어지는 한 세상이 반드시 기대대로 희망대로 아름답게 진보하리라 믿었고, 귀국 후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한, 혹은 불가시적일 만큼 느린 변화 속도를 따르는 현실 사회를 목격하고는, 뇌 속에서 울리는 정체모를 불쾌한 잡음을 꽤 오랫동안 견뎌야 했던 상황이다.
한 가지 예로, ‘꼭 뽑아야할 사람을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에선 꼭 떨어뜨려야할 사람을 떨어뜨리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생각해서 낙선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돌아와 맞이한 총선 유력 후보자들 이력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존속살인’, ‘방화’, ‘성범죄’ 등이 거리낌 없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눈을 의심할 상황이었고,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가’라는 질문에 갇혀, 누군가가 동의해줄 때까지, 스스로의 급성 악화된 정신질환을 의심하는 지경이 이르렀다,
물론 그 중 정점은 전과 14범이 당당 대통령에 당선되는 장면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투표결과는 공교롭게도 늘 생일에 이루어졌다(국정농단/대통령탄핵 이후 5월 대선을 제외하고!) 그래서 2007년 생일날 새벽은 어떤 의미로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은 “이 따위 세상, 이제 막 살아버릴까”라는 생각에 진지하고도 깊이 침잠하였다.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이 필요하다. 168
어쩔 수 없이, [매트릭스]의 빨간 약, 파란 약이 떠오른다. 속기 싫다면, 두렵지만 눈을 제대로 뜨고 잘 살펴봐야 한다. 어차피 유일하게 의미 있는 현실이란,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는 현실 밖에 없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인용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믿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이 ‘공정세계’라면, 그런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드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미리 쫄지 말자, 수퍼히어로가 아니라 모든 일은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일, 그러니 할 수 있다.
찌질하고 이율배반적인 자신에게 실망하기보다 “이건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내가 미처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가 충분한 변명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벙어리장갑은 알아차리고 결정장애는 못 알아차린 그 이상하고도 낯선 스스로의 사고의 균열이 아마 이후로도 오랫동안 의아할 테지만,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마 우리 모두는 서로의 삶의 방식과 장소와 시간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차별을 주고받으며 사는, ‘모두가’ ‘어느 지점에서’는 ‘다양하고 중첩되는’ 차별주의자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 서로 간에 신뢰가 있다면, 그리고 모욕을 가하거나 비난을 할 의도가 없다면, 좀 더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잘’ 말해주면 되는 일일 것이다.
기성세대가 되고 말았다란 낭패감도 있지만, 이만큼 살아보니 이제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가끔 우쭐했는데, 오늘부터 1일이 시작되어 앞으로 평생을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야할 정체성이 생겼다. “나는 언제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마에 새긴 주홍낙인보다 더 선명한 이 진실과 더불어 살려면, 앞으로는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도 더 예민하게 해야 한다.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수백 가지의 해법이 있겠지만, 차별금지법은 그중 하나로 우리가 서로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들자는 즉각적인 해법이다. 이 해법은 ‘나도 차별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195
수많은 빼곡한 하나같이 명철한 내용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을 생략하고, 2007년 법무부가 제정을 시도했으나, 아직 제정되지 못한 <차별금지법>의 법안들이 반드시 법률로서 구체화되기를 끝까지 함께 응원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또한 이 책이 대학 이외의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쓰이거나, 추천도서로 권장되기를 기원하고자 한다.
214에서 243에 이르기까지, 30쪽을 주석과 참고문헌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2019년 여름에 출간되었지만, 이 책은 여름이 간다고 ‘다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저자의 의지와 선한 의도와 집필의 수고와 미래에의 희망을 더 많은 독자들이 더 깊이 깨닫고 더 널리 알려주기를 바란다.
비로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가 우리 시대에 실천할 수 있는 시대정신이 된다면, 소수자들만도 아니고 특정 집단들만도 아닌 모두가 더 살기 편한 사회를 앞당기는 일에 큰 도움이 될 통찰과 이념이 담긴 귀중한 저서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