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예쁨상을 드립니다
한승완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때론...... ‘그냥도 할 수 있는 말을 만지작거려 반짝반짝 별처럼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시들이 있다. 반짝거린다고 다 기쁨의 노래는 아닐 것이다. 세상의 무수한 사랑/연애가 그러하듯이.

 

연애에 관한 한 체력도 홀몬도 바닥인 내게 지인이 소개해준 무려 연애시집이라고 적인 이 새빨간 시집을 받은 지가 꽤 지났다. 시집은 추리소설처럼 그 내용이 궁금해서 서둘러 덥석 펼쳐보게 되는 것과는 좀 다른 결심(?!)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읽고 싶은가, 읽어야 하는가, 충분한 시공간이 비워져 있는가 등등...... 어쨌든 나는 그렇다. 괜스레 무더위 탓을 하면서 그 타이밍을 못 찾아 펼쳐 보는 일을 하루하루 미뤘다.

 

그러다 7월이 가기 전 뭐라도 읽어 보자란 조바심에, 저자가 자신을 가수 신승훈의 열혈팬이라 소개한 내용이 생각나 [신승훈 4, 그후로 오랫동안(1994)]을 플레이하고 시집을 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MAnD34qLIQ

 

감사하게도 시집이란 읽는 순서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백 편이 넘을 듯 한 시집 제목을 훑다가 모르는 단어로 된(그래서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그래서 흥미로운) 제목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감또개

 

화가는 날렵한 붓으로 얄궂은 춘풍을 일으켰다

탯줄을 부여잡은 어린 감

본능도 품어 주지 못한 중력 법칙은

순사가 휘두르던 검마냥 날카로워

생이별을 자행했다

 

화가는 소도록한 감또개 주검에

미색의 감꽃으로 습과 염을 한다

갈라진 붓끝으로 촘촘히 수의를 입힌다

떨어져 나간 새끼가 안쓰러운 감나무는

숨죽인 채 가지를 흔들며 조사를 읊는다

떨어진 감꽃들이 상여를 메자

화가는 흔들리는 가지에 못을 박듯

붓으로 피눈물을 찍어 댄다

 

감또개는 그렇게 세월 속에 묻혔다

화가는 절규를 폭발하여 삭풍을 일으켰다

악착스런 모성이 부여잡은 까치밥도

서리가 내린 새벽이 오자 자취를 감췄다

 

화가도 어느 순간

앙상한 가지만 뻗어 있는 감나무를

이젤에 남겨 놓은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아름다운 청춘의 꽃 한번 피워 보지 못한 채

위안부란 이름으로 환한 낮에 별이 되어 버린 소녀처럼

 

삼월의 첫날

언젠가 욱일기에 고개 들지 못하고

숨죽이며 펄럭이던 태극기들이

오늘 아파트 베란다에서 구슬픈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감또개의 뜻 :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뜻밖의 시와 만났다. 어찌 보면 더할 수 없이 시의적절하기도 하다. 얼마 전부터 가끔 지금이 준전시 상태는 아닌지, 이렇게 태연하게 아무 이도 없는 듯 사는 게 맞는지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다. 이념보다 강력한 것이 경제라, 다국적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그 복잡한 사정이 응집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가능성 제로라는 위안적 판단도 들지만, 인류의 역사가 언제 총체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지한 적이 있었나 싶어 두렵기도 하다. ‘감또개란 단어가 궁금했을 뿐인데, ‘연애시집의 첫 시를 읽고 전쟁이야기로 흘렀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백편이 넘는 다른 시들이 있다. 하나씩 넘기다 보면, 내가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를 떠오르게도 하고, 지금 나에게 남은, 자리 잡은 혹은 새롭게 인식된 사랑이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한 때는 예쁨상이란 상은 매일 받았을 법한 과거의 연인들도 현재의 홀로인들도, 어깨가 지나치게 무섭고 일상이 너무 오래 씁쓸한 날에 어쩌다 입에 대지 않던 달다구리에 손을 뻗치듯 그렇게 두고두고 읽어보는 친구로 삼으면 좋겠다. 그럴 때 이 시집에서 체리향이 풍기는 사탕 같은 한 편을 발견하거나 토페 향이 진한 초콜릿 같은 한편을 발견하면 오래도록 건조한 입 안에서 천천히 녹여 먹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

 

https://blog.naver.com/kml0516/221573298672

에필로그 암호를 푼 대단한 독자분 글을 링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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