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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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부터 홀리는 책은 오랜만이다.

해가 지고 불이 들어오고 그래도 아직은 색채가 남아 있는 시간.

차이와 다름이 잘 구분되지 않고

돌아갈 집이나 사람이 없는 이들은 죽도록 외롭고 쓸쓸해

어쩌면 이쯤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올 수도 있는 시간.

 

비슷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 건너편 아파트에 빽빽하게 모여 비슷하게 살아가는 동안다른’ ‘혹은 생각보다 많은 그들은 강 이쪽에서

차의 빈자리 하나도 마저 채우지 못한 채

어디로 갈까…… 하고 자문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죽도록 쓸쓸하고 우울한 내용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소 실망스럽게도) 기대를 벗어날 만큼 가볍고 빠르게

짧지 않은 삶의 한 시기를 통과하며 통쾌하고 유쾌하게 들려주는

가감 없는 이야기이다.

 

혹자는 게이스럽다,’ ‘가볍다라는 점에 당혹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포착해낼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맨 몸으로 치장 없이 삶을 맞닥뜨리고 살아내는

그 젊음이 통째로 부럽기만 하다.

 

워낙 포장과 치장이 없어서인지

4편의 연작 - 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 을 다 읽고 나니, 작가와 비정상적인 친밀함을 (혼자) 느끼는

스토커적인 기분에 휩싸이는 지경이 되었다.

 

거리낌 없는 거짓과

잘 포장된 위선과

수치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변명과

아마도 끝까지 반성 없는 꼰대들이 득실거리는 미세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오랜만에 맑은 숨을 쉰 듯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나는 나의 꼰대 치수를 재는 바로비터로

부분부분 반성과 회한에 젖어 이 책을 읽었고,

자신을 전혀 방어하지 않고도 이 책을 재밌게 읽어낼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댓가로 얻었다.

 

사실 댓가 따위 없어도 좋을 만큼

2019년 상반기를 기억상실로 살아낸 것처럼

이 소설이 유일무이 최고라고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는 게 여전히 꼰대스럽긴 하지만

잊고 있었던, 잊어버렸던, 최선의 경우라면 심연의 어디쯤 묻혀 있던,

상큼발랄 명징한 정신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4편의 연작 소설들의 늘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소설이, 이런 작가가 우리 곁에 있다.


꼰대 바로미터가 되어 준 구절들.

대부분의 평범한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에게는 답답한 상식을 들먹이면서도 뒤로는 신나게 외도를 하거나 종교나 주식, 다단계 같은 것에 미쳐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16


철구 미친 새기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 19


의사: 학생이 꼭 내 딸 같아서, 걱정이 돼서 그래.(...) 여자의 몸에 제일 해로운 게 뭔지 알아요? 방종하고 안전하지 않은 성생활이야.(...)

재희: 임신이랑 출산이 제일 나쁘다던데요?(...) 여자 몸에 태아는 이물질이나 다름없다고 하던데요. 임신이나 출산만큼 몸에 해로운 건 없다던데. (...) 38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6


(...)둘 다 자존감이 낮고, 주기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고 꼴에 예술영화나 책 같은 것을 즐겨 보며 하루키와 홍상수, 불문학과 아우디 같은 구질구질한 것들을 혐오하는 공통점이 있는 게이라 서로를 꽤 특별히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48


재희의 하객 중 적어도 세 명 정도는 재희랑 잤던 남자들이었고, 둘은 나랑 잔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때때로 성소수자가 정말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순진함에 놀라곤 한다.) 64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68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절대 털어놓지 못할 심연을 마구 휘저어

잠시 통쾌함을 선물처럼 가져다 준 구절들.


남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그냥 미안한 짓을 안 하면 될 일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용건을 늘어놓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나에게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주고 싶은 것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우리 사이에 더 주고받아야 할 건 욕밖에는 없었다. 72


지난 3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해봤자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피우는 사람들 얘기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뭘 보고 착하다는 건지. 두 번만 착했다간 사람도 죽이겠네. 아무튼 교회 아줌마들의 립서비스는 알아줘야 했다. 75


엄마가 하도 코를 골아서 엄마와 같은 방을 쓰던 환자가 두 명이나 병실을 옮겼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뭐가 마음에 안든다 난리더니 막상 아무도 없으니 밤에 저승사자가 너무 쉽게 데려갈 것 같다는 등 40년차 기독교인답지 않은 샤머니즘적 발언으로 다채롭게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76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차장에게 퇴사 후 글을 쓸 거라고 해버렸다. 평생 꿈꿔왔던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 꿈 그거 좋지. 그러나 이거 하나는 기억하게. 기회는 기차와도 같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79


(...)엄마는 자궁암 명의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한 종합병원 수술대에 누워,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다며 수술할 때 마취를 하지 말아 달라 의료진에게 요청해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정신과 치료도 함께 받게 되었다.(드디어!) 79


자기소개의 마지막 순서였던 남자는 자신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작곡을 하는 것도, 미술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을 한다는 그 문장이 이가 시릴 정도로 쿨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불길한 관종의 기운을 느끼고야 말았다(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82-83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장답게 죽도록 바람을 피워 이혼을 했으며, 엄마는 대한민국 중노년층 사망 원인 1위인 암에 걸린 환자랍니다, 말해야 하나. 85-86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90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든 저 여자가 늙고 병들면 경기도의 외진 숲에 내다버리고 말리라, 산 채로 미친 들짐승의 먹이로 만들 것이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100-101


그를 알기 위해, 나아가 그에게 빠져드는 나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 모순을 해석하기 위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관찰했고 기록했다. 천년만년 학위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처럼. 절박하고 가련하게. 113


왜 나이든 꼰대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명쯤 불러대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어젠다를 천 개쯤 대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걸까. 알아서 뭐 하게. 알면 뭐가 달라져. 비슷한 것을 알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게. 역시 애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내가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군, 여기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며 몸 같은 것들을 자위질해대려고? 132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어졌다. 딱 한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럴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라도 사과 받고 싶은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우스워지면서……. 149


그때 그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천지가 다 멎어버린 듯한 그 얼굴은 마흔여덟 가지의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이 분명했다. 절망이나 고통 따위로는 단순화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고요를, 뭔가를 꾹꾹 눌러 담는 형태의 감정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157-158


서른 장도 넘는 일기에는 그를 만날 때마다 끓어 넘치던 나의 과잉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알지 못했다. 그와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마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듯 그에게 내 날것의 마음을 던졌다. 166-167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 169


엄마는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네가 너를 바라듯 주도 너를 바라고 있다. 잠시도 불쌍해할 틈을 주지 않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 엄마는. 171


나는 (...)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 나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177-178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179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181

 

[대도시의 사랑법]이란 연작소설책 중

대도시의 사랑법이야기가 빠진 것이 공교롭긴 한데,

이미 서평을 올려서 그렇다. 

https://blog.naver.com/kiyukk/221571651196

 

 

현재의 혼란과 체력/지능 저하를 대신 변명하듯 들려준 위로의 구절들.


책상에 있던 물건들을 하루에 하나씩 집에 들고 갔다. 모든 물건이 정리될 때쯤 사표를 냈다. 뭐 대단히 신나거나 설레거나 후련한 기분은 아니었다. 실은 다 지겨웠다. 260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 논리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내 인생의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게 분명했다. 272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307


이해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전하지 못하는 말들은 산산이 흩어져간다. 소설은 가깝기에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심리적 착취를, 출구 없는 증오를,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의 무한회로를 반복하며 가족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가만히 바라본다. 325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토록 사랑스러운 작가.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2019년 여름

사랑하는 나의 대도시, 서울에서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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