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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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토록 도발적인 소재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자식들이 한번쯤 눈물 지으며, 혹은 상한 속을 감추며 상상해본 소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페인트]: 페어런트 인터뷰: 부모 상담, 즉 부모 될 이들을 자식 될 이들이 상담을 통해 정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춘 태도로 NC 센터를 찾아온 이 예비 부모(pre foster)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11

 

아이들을 통솔하고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가디언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줄여서 가디라고 불렀다. 11-12

 

이곳의 다른 가디들 또한 모두 아이들에게 헌신적이었다.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 주려고 노력했고, NC의 꼬리표를 지워주려고 노력했다.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기를, 편견에 찬 시선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16

 

그러나 그런 도발적 통쾌함만이 오래가는 소설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마음이 먹먹하고 눈이 뜨거워졌으며, 더 자주 부끄러웠다. 소위 기성세대가 되고 나니, 상상한 것 이상의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가끔은 너무 자주 찾아온다. 절반은 내 자신의 과오로, 절반은 다른 동시대의 기성세대들의 작태로 인해.

 

성인이 된 후 이곳을 벗어난 사람들이 어떤 차별 속에 사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NC의 아이들은 부모 면접을 통해 서둘러 센터를 떠나려고 한다. 물론 마음씨 좋은 새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애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며 가족이라는 그럴싸한 가면은 뒤집어 쓴 채 살아간다. 12-13

 

“NC 출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말도 안 되는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게 더 어렵죠.” 13

 

태어날 때 만나야만 부모니? NC의 아이들은 모두 열세 살부터 부모를 가질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우린 버려졌다는 뜻이죠.”(......)

너희는 바깥세상 아이들과 달리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야.” 22

 

사생활이라는 이름 하에 감춰지고 처벌받지 않고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수많은 폭력들에 오랜 세월 분노하고 가능한 작은 변화를 위한 후원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미래세대를 구해내기에는 요원한 세월이 유구하다. 그런 현실이 매일 반복되고 혹은 더 가혹해지고, 매년 몇 명의 아이들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는지 통계가 나오고, 그런 현실을 알지만 여러 이유로 눈을 돌리고 행복을 과장하거나 가장한 채 살아가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는 것도 서글프다. 최선을 다해 있는 힘을 다해 잘 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이들도 수없이 많을 텐데, ‘전체를 아우르는 바람직한 변화란 참으로 느릿느릿 육중하다.

 

부모가 키우기 원치 않는 아이인 경우 국가에서 운영하는 메디컬 센터에서 아이를 낳고 그와 동시에 NC 센터에 맡겼다. 그런 부모들이 늘면서 당연히 NC에도 아이들이 늘었다. 26

 

그러나 정부에서 받는 혜택만을 노리고 무분별하게 부모 면접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방임하고 학대하는 부모가 생겼고 더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 보다 못한 정부는 NC 아이들의 입양 가능 연령을 상향했다. 싫은 것과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열세 살 이상의 아이들만이 부모 면접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연령 제한으 높이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NC 센터에 관심을 보였다.(......) 힘들여 아이를 키워야 하는 시간이 보통보다 십 년 넘게 단축되었다는 것과, 양육 수당과 연금을 앞당겨 받을 수 있다는 혜택. 29-30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면, 아니,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바깥세상 아이들은 뭐라고 할까? 39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41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상대를 원망하기 전에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인과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42

 

17세 주인공은 젊은이답게 이 작품 속에서 빠른 성장을 한다. 그의 성장에 여러 영양을 주고 받는 인물들과의 대화는 작가가 섬세하고도 치밀하게 배치한 덕에, 가끔은 어린 시절의 내가 소환되기도 하고, 젊은 내가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하고, 그리고 기성세대인, 그러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를 맞닥뜨리게 되기도 했다. 성찰과 반성의 이야기들인데, 문학적 얼개와 속도감과 자연스러운 전재 방식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44-45

 

누군가가 나를 꿰뚫고 있다는 기분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가 전부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진짜 상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인간들인데. 61

 

아이는 부모의 필요에 의해 태어난 존재들 같아요.”(......)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하면서 사랑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같은 거요?

저보고 어떤 부모를 선택하겠냐, 묻는다면 저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부모라고 답하겠어요.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사람은 싫어요(......).” 76-77

 

제목과 소재가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기성세대를 대시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 자신이 밝혔듯이,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인생, 처음 맡아 보는 역할, 연습도 단 일회의 리허설도 여유가 없는 매일의 현실에서, 조금 더 살아 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아주 운이 좋은’, 그래서 모든 것이 그날따라 잘 풀려나가는 경우일 것이다. 부모가 된 이들, 그들은 그럼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통찰도 신랄하고 서글프다. 그리고 결국엔 위로로 남는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육아서를 전혀 읽지 않은 부모보다 한 권이라도 읽은 부모가 더 낫다는 건 사실인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고 잘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증거일 테니까. 그러나 그런 준비들이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가 아닌, 부모의 계획대로 만들어지는 아이도 있을 테니까. 91-92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족한테서 가장 크게 상처를 받잖아.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거야.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아이의 성격과 가치관, 나아가서는 인생까지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거든. 105

 

모두들 얼마나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는지 자랑하기에 바빴다. 자신들도 뒤늦게나마 그런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가족이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니 우리가 따뜻한 가족이 되어 주겠다, 선심 쓰듯이 말했다. 자신이 부모에게 상처받았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108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111-112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112

 

가족이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먼발치라는 말의 뜻은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대화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라고 한다. 그게 부모와 자식 간의 마음 속 거리가 아닐까. 서로를 바라보지만 대화는 할 수 없는 거리 말이다. 160-161

 

우리가 부모를 선택한다는 것은 부모가 아기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자기 아기에 대해서 엄청난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보다는 잘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환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183

 

곳곳에 굳은 결심을 하고 애를 무한정 쓴 인격체들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도 있다. 늘 부럽지만, 내 삶에 언젠가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만 남는 깨달음들. 그래도 할 수 있는 누군가들은 이런 수준에 도달해 주면 좋을 듯하다. 그런 삶을 사는 동시대인의 존재 자체가 다른 이들의 희망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113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 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159-160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아픈 과거를 겪었지만 끝내 스스로를 놓아 버리지 않았고, 끔찍한 기억이 스스로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185

 

하나와 해오름은 명령이 아닌 질문과 반성을 할 수 있는 부모였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마찰로 어려움을 겪게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와 해오름은 자신들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와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두 사람은 부모 준비가 끝난 사람들이었다. 189

 

어른으로서 이런 말,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 힘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연약한 존재들을 짓밟지. 특권 의식을 누리려는 거다. 힘 있는 자들만이 아니다. 힘이 약한 사람들도 그런 특권 의식을 지니고 있어. 자신도 약하면서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들을 짓밟는 거다.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 누구나 기피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193

 

어른으로서의 우리는 부끄러움을 줄이는 방식으로 살아 보고, ‘미래세대는 제공된 현실적 조건들과 미숙한 어른들로 인한 어려움에지지 말고 희망을 키워 나가고,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서로를 좀 더 자주 용서하고 좀 더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대화의 창구들이 많아지고 쉬워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이 아닐까? 196

 

마지막으로, 절절한 작가의 말을 옮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남에게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스스로에게 해주는 수밖에.

 

누군가 내게 왜 청소년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이유를 듣고 싶다. 유년 시절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고.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하면 돼. 괜찮아, 잘될 거야.(......)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신 당신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전한다. 당신의 가슴 속에도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한번 말을 걸어 보길 바란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하고 있어, 진심으로 격려해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2019년 봄 이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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