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편 1은 돈황과 하서회랑, 명사산 명불허전이다. 저자에게는 꿈에 그리던 돈황/실크로드 답사였고, 그냥 명불허전이 아니라 감동의 울림이 진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런 장대한 답사를 꿈꿔본 적도, 꿈꿀 만큼 지식이 있거나 호기심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작가가 받은 감동과 체함 내용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견문과 정보들이 이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언제라도 그것들이 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은 날 끝까지 그런 기회가 없더라도 최고의 간접경험이 될 것을 믿는다.
다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하나같이 그러했듯이.
다음의 내용은 잘못 알려진 상식이나, 알면 재미있을 듯한 상식 관련 내용을 눈에 띄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예전부터 유명했으나, 이런 소소한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답사기를 자칫 고루하게 만들지 않은, 연령대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큰 매력이자 장점으로 보인다.
달리는 차창 밖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답사의 즐거움이자 작지 않은 배움의 기쁨이다. 지나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면 그 순간 자연 풍광이 역사의 현장, 전설적인 이야기의 고장으로 바뀐다(...). 돈황 답사를 하면서 내가 국내답사와 다르게 느낀 점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상상한다'는 것이었다. 35-36
풍수에서 산의 경우는 남쪽이 양이고, 강의 경우는 북쪽이 양이다. 그래서 함양 땅은 산과 강의 양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두 함, 볕 양, 함양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울의 강북을 '한양'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37
진나라의 수도 함양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사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궁궐의 이름도 아니었다... 아방의 아는 가깝다는 뜻이고 방은 곁 방 자와 같은 뜻으로 합쳐서 근방이라는 뜻이다. 즉 함양궁 근방에 있어서 아방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37-39
중국의 모든 유적지에는 반드시 명시가 따라붙는 한시의 전통이 이어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의가 더욱 드러난다. 한시는 중국이 세계에 대놓고 자랑할 만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두목지가 불과 20대에 지은 [아방궁부]는 아방궁의 호화로움을 표사한 것도 절창이지만 마지막에 세상을 향해 던진 대목은 가히 명구로 삼을 만하다.40
(상당한 분량이라 여기서 올리진 못하지만, 절창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많은 분들이 읽어 볼 수 있길 바란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 동질성을 내세워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오늘날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것은 이들을 자율적인 삶에 맡기지 않고 직접 통치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50
(기회가 있다면 티베트의 역사와 독립운동, 티베트 승려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저항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답사객들과 중국을 답사하다보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정도에 따라 자연풍광에서 인문풍광으로 옮겨가는 강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경험적으로 말해서 [연의 삼국지]를 읽은 사람과 아닌 사람은 차이가 많다(...). 그중 최고로 나는 [비데오 삼국지]를 꼽는다. 56-57
(...)사실 중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무형유산이 한시라면 유향유산은 도자기와 청동기다(...). 그리고 주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문화의 뿌리이고 원천이다. 공자님도 정치의 이상으로 생각한 것이 주나라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제기의 원형은 모두 주나라 청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내가 서울 답사기에서 예찬한 종묘의 제기도 따지고 보면 주나라 제기의 조선적인 세련미었다(...). 경복궁 건설의 모델로 삼은 [고공기]는 [주례] 마지막 편에 나오는 것이다. 63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지 않고 말해왔다.
"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생활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85-86
평생 유배객 신세를 면치 못했던 소동파는 [세아희작, 아이를 씻기며 장난삼아 짓다]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며 총명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놈의 총명함 때문에 일생을 그르쳤다네.
이에 원하노니 우리 아이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아무 탈 없이 무난하게 정승판서(공경) 되거라. 89
(...) 저녁 후 한잔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백의 술 권하는 시를 하나 읊겠다고 했다(...), [월하독작,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4수 중 두 번째 노래였다.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응당 주천이 없었겠지.
천지가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네.
듣건대 청주는 성인에 비길 만하고, 탁주는 현자와 같다 하니
성현들도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라겠는가.93-94
중국술을 고고학적으로 말하자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도 술 주 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는데, 1983년에 역시 우리가 오늘 지나온 섬서성 보계시 미현(양가촌)에서 신석기시대 앙소문화의 술 전용 도기가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대략 6천 년 전부터 이미 술을 빚었다는 얘기다. 95
잔도는 2천여 년전, 진한시대에 전란을 치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삼국이 쟁패를 다투는 내전으로 전국이 싸움터로 변했던 [삼국지]의 전투현장에서 정정에 달하여, 검각도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잔도가 가설되었다. 잔인한 전쟁이 낳은 유산인 셈인데, 이것이 나중엔 험준한 산길을 닦는 데 이용되어 전국의 유명한 명산엔 다 잔도가 가설되어 있다. 108-109
(...)바야흐로 우리는 잔도를 따라 본격적으로 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221개의 석굴의 7천 8백 불상 중 과연 어느 굴의 어느 불상을 눈여겨볼 것인가(...). 무엇을 어쩌자고 하나의 절벽에 천년을 두고 그렇게 많은 석굴을 조영했던 것이며, 시대마다 불상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가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상이 그 불상으로 보여 나중에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곤 '불상 한번 많구나!'라는 인상뿐이다. 이럴 때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10-112
"맥적산석굴을 보았으면 중국엔 참으로 위대한 석굴문화가 있었구나라고 감동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왜 우리나라에 이런 전통이 없냐고 기가 죽어야 합니까. 이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내지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되는 법입니다. 불교는 인류가 낳은 위대한 종교로 이를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아시아의 민족들은 고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였고 신앙의 형태는 그 나라 그 시대, 그리고 자연환경에 맞게 만들어져갔습니다. 138-139
이제 우리는 남의 문화를 볼 때 그 자체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보면서 세계사적 견문을 넓혀야지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나 없나를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꼭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공연히 민족적 자괴심을 갖는 것은 진실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중국의 석굴사원을 찾아가고, 일본의 사찰정원을 감상하고, 한국의 산사를 답사하는 보편적 시각을 가져도 좋을 만큼 우리는 문화적으로 성숙해 있다고 믿고 있고, 또 그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41
중국 답사기의 1권은 돈황 답사'까지'의 내용이며, (유홍준 교수가 첫 답사 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2차로 떠난 답사) 2권에서 '돈황'답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자의 흥미를 돕기 위해 조금 소개하자면, 2권에서는 돈황 약탈자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드라마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화재들이 어떤 약탈 과정을 거쳐 도착했는지 등, 현재의 우리와 관련이 깊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꼭 2권까지 많은 분들이 읽으시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늘 기대 이상일거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다음 편을, 중국편 3권을 애타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