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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계약이다 - 안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박수빈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인류가 생존하는 한 ‘사랑을 하고 실패를 하고 혹은 성공을 하는’ 경험들은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스토리들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문화 전반의 소재거리이며, 사회 전반에 온갖 비용과 법과 제도의 실행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전방위적 ‘사건들’이다. ‘사랑과 연애’라는 소재를 완전히 제외하고 남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몇 개 분야의 학술논문쯤이 아닐까. 그러니만큼 그에 대한 누적된 고민과 좌절과 특히 실패담들이 계절풍처럼 변함없이 떠돌거나 되돌아오지만, 그에 반해 유용하거나 확실한 도움이 될 조언과 지혜는 늘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안일한 태도로 임했던 지난 연애들을 돌아보면, 나는 연애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지루하게만 느꼈던 것 같다. 상대방을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기보다 내 삶의 기본 값인 것처럼 여긴 적도 있었다.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지 않는 상대방을 두고 그의 방식을 알아보거나 인정하려는 노력 대신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너의 얕은 감정 때문에 나는 너무 외롭다”고 직접 상대방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고, 때로는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수십번 수백번 엑스 표를 치고 그와 헤어져야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다 이별을 맞이하기도 했다. 11
‘연애’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둘 사이’의 배타적 경험을 지칭하는 것이니, 둘이서 해결할 수 밖에 없고 타인이 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강력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맺기’라는 점에서 ‘연애’는 완전히 개별적, 사적, 비공개적 행위가 아니기도 하다.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선 안에서가 아니라면, 연애 역시 당사자들이 속한 ‘사회’ 행위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외부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적 조언을 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조언이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사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현직 변호사가 자신의 사적 경험들을 통해(본인과 주변인물들) 깨달은 점들과 더불어 ‘안전하고 자유롭게’ 사랑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연애도 계약’임을 기억하라는 현실적인 사랑학 가이드를 제공한다는 장점을 가진 책이다. 계약을 통해 행동과 감정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꼼꼼한 사전 계약이 사랑과 연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들려준다.
계약을 잘 유지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작업은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서로가 서로에게 계약 목적에 맞는 상대방인지를 제대로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계약이란 상호간의 의사의 합치를 의미하는 만큼, 계약서라는 종이 다발은 서로의 의사가 합치되었다는 증표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계약의 내용대로 약속을 하고 이것을 지킨 의지가 있는가, 이 계약을 체결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완료될 때까지 계약이 유지될 수 있는가 같은 사전 점검 과정이 잘 이루어졌는지 여부이다. 14
연애와 계약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직관에 들 수도 있지만,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 이 두 소재를 쉽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잘 엮어서,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피할 수 없이 들려 오는 뉴스들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지키며 연애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시하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고 묻던 박원의 노래 ‘노력’의 호소처럼, 노력과는 관련이 없거나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노력과 무관할지 몰라도 그 사랑을 유지하고, 상대방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상대방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분명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을 유지하고 전하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 과정이 ‘연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에는 노력과 신뢰가 필요하고,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제대로 된 교섭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계약처럼. 15
이는 저자가 갈등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체화된 변호사로서의 직접적 장점일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내용 전반이 무시무시한 사례의 나열과 비장한 호신술과 같은 맹약들이 아니라, ‘썸 타기와 사전 교섭’, ‘임대차 계약시 등기부등본열람과 비교되는 상대방의 연인 유무 확인’, ‘양다리와 이중 계약’ 등 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발상으로 진행된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마크 다시(콜린 퍼스)가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에게 “I lile you very musch just as you are”(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라고 말할 때 브리짓이 받았을 그 설렘을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낼 수 없었고,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을 하고 상대방에게 온전하게 솔직하기는 어려웠다. 23
이 많은 것들을 덮어놓고 물어보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으레 내가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니까 우리는 당연히 같은 생각일 거라 넘겨짚고 연애를 시작했다가는 기대와 다른 행동들에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 가볍게라도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서로의 입장을 내비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시간을 소위 ‘썸을 탄다’라고 하는데 썸을 타는 단계는 그래서 계약에 비유하자면 계약 교섭 단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31
몇 년 전 소유와 정기고가 함께 부른 ‘썸’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요즘 따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니 꺼인 듯 니 꺼 아닌 니 꺼 같은 나”가 주요 가사다. 연애는 ‘서로가 서로의 것(소유물)’이 되는 것이고 썸은 바로 그 직전 단계라는 뉘앙스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가사에 공감을 했다. 소유권자에게 소유물을 통제하고, 이용하고, 변형하고, 처분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귀는 사이가 되면 연인에 대해서도 그러한 권리가 발생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해온 것 같다. 그러나 단지 사귀는 사이라는 이유로 연인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현실에서 많은 문제를 낳는다. 통제를 거부한 상대방에게 가하는 연인의 폭언이나 폭력이 마치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 것마냥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79
적어도 연애 상대방이라면 저 사람이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연애는 한쪽이 다른 쪽을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다. 소유권이란 소유물을 법률이나 사회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사용하거나, 이를 이용해 이익을 얻거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 연애 상대방을 사용할 수도, 이용해서 이익을 얻을 수도, 처분할 수도 없다. 83
또한 연애는 노예계약이 아니다. 연인이라고 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다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혜적으로 마음을 주고, 관계 유지에 필요한 행동을 주고받는 계약일 따름이다. 남자가 나무라면 여자도 나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과 연애를 해야 한다. 남자가 배라면 여자도 항구가 아니라 배다. 망망대해를 함께 운할할 배여야 한다. 83
더구나 이 비상한 시기에(어느 한 시대가 여성에게 덜 폭력적이고 덜 위협적인 시대가 있었나 싶긴 하지만), 데이트 폭력, 불법영상물 유포 등 디지털 성범죄가 매체의 특성상 광범위하고 막대한 파괴력을 양산하는 이 시기에 반드시 널리널리 배포되기를 원하는 지침서라 소개하고 싶다. 특히, 스토킹이 진정한 사랑과 용기라고 여전히 일부 인정받는 사회적 이해로부터 벗어나, 디지털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스토킹 또한 애초에 계약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 싫다는데 ‘열번 찍으면’ 범죄라는 점이 상식화 되기를 바란다.
질문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필요나 의무는 없다. 무언가를 요청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구애 상황에서도 반드시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다...... 연애는 양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특정한 관계를 맺기고 약속하는 계약과도 같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계약을 체결할 의무’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33
연애관계에서는 둘 사기에 발생하는 문제를 제삼자가 해결해줄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합의와 교섭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 다양한 연애관계가 존재하고 때로 서로의 역할이 불균형한 관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사귀기로 약속을 할 때는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연애를 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어느 한쪽의 강압이나 구걸에 의하지 않는 것, 사귀는 과정에서 서로 할 말은 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목에 칼을 들이대며 “나랑 나랑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라고 말한들 그게 무슨 연애관계의 성립이겠나. 마찬가지로 “나랑 서귀어주기만 하면 모든 걸 다 해줄게”라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사람의 구애를 마지못해 받아들인들 그건 그것대로 연애라고 하기 어렵다. 86-87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100%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경우, 민사 및 형사소송으로 맞설 수 있는 방법 등의 상세한 법적 조언도 들어 있어, 사랑이 범죄로 돌변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침도 얻을 수 있다.
3부 이것은 연애가 아니다
원나잇의 원칙: 낯선 사람과의 설렘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조건들
데이트폭력: 더이상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 은밀한 공간에서는 카메라를 든 당신의 연인을 경계하라
스토킹범죄: 거절하는데도 ‘열번 찍으면’ 범죄다
연애도 계약이라는 묶음을 보는 순간, 뭔가 막 이해타산적인 관계를 연상하는 오해로부터 좀 더 나아가,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섬세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행복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안전해서 더 큰 행복으로 귀결되는, 덜 아프고 더 행복한 사랑법을 함께 고민해보는 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애는 헤어지더라도 결코 연애를 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함께 쌓은 추억, 데이트로 지출한 비용과 시간, 친구들에게 공유했던 이야기들, 그 어떤 것도 주워담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연애는 ‘해지’할 수는 있어도 ‘해제’할 수는 없는 특별한 계약이다(계약의 해지안 계약을 끝낸 시점 이후부터 계약관계가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해지 시점 이전까지는 유효하다는 의미이다. 해제는 계약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계약 시작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소급적용해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35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사람과는 계약을 이어나갈 수 없다. 그런 사람과는 연애라는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불공정함을 마주하며 산다. 연애에서마저 이러한 불공정함을 견딜 이유는 없다. 내가 원하는 신념을 지키고 존중하는 다른 사람과 제대로 합의된 연애를 하자.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