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mans had reason to dread, that the disjointed members would soon be reduced by a civil war under the dominion of one master; but if the separation was permanent, the division of the provinces must terminate in the dissolution of an empire whose unity had hitherto remained inviolate.

Had the treaty been carried into execution, the sovereign of Europe might soon have been the conqueror of Asia; but Caracalla obtained an easier, though a more guilty, victory.

- 국역본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사람의 황제 통치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황제가 곧 아시아의 황제를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 번역 수정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주인의 지배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154p)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주권자가 곧 아시아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세베루스의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크게 오역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좀더 원문에 맞춰서 직역했다.




But as the Roman emperors were still considered as the generals and magistrates of the republic, their wives and mothers, although distinguished by the name of Augusta were never associated to their personal honors; and a female reign would have appeared an inexpiable prodigy in the eyes of those primitive Romans, who married without love, or loved without delicacy and respect. The haughty Agripina aspired, indeed, to share the honors of the empire which she had conferred on her son; but her mad ambition, detested by every citizen who felt for the dignity of Rome, was disappointed by the artful firmness of Seneca and Burrhus.

- 국역본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 황후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을 때, 그녀는 제국을 아들과 공동 통치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175p)

- 번역수정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는 자신이 아들에게 수여한 제국의 명예를 아들과 나누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정신 나간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인 마마이아의 권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로마제국에서 권력에 가까웠던 황후들을 논의하고 있다.
원문에 없는데 역자들이 추가한 부분은 삭제하고 일부 표현을 고쳐봤다.



The Prætorian guards were attached to the youth of Alexander. They loved him as a tender pupil, whom they had saved from a tyrant‘s fury, and placed on the Imperial throne. That amiable prince was sensible of the obligation; but as his gratitude was restrained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nd justice, they soon were more dissatisfied with the virtues of Alexander, than they had ever been with the vices of Elagabalus.

- 국역본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던 것이다. 황제는 그들에게 감사의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 황제의 미덕과 선정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근위대는 어린 알렉산데르에게 접근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다. 이 정감가는 군주는 그들에게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의 덕성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군대로 인한 정치상의 혼란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어쩌면 잉글랜드에서 9년 전쟁 이후 강화된 군 전력에 대한 논쟁의 역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단락에서 기번은 알렉산데르가 군대 개혁을 시행하면서 군대와 관계가 악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국역은 의역이 많이 가해져 직역체로 바꾸었다.



But the favor which implied a distinction was lost in the prodigality of Caracalla, and the reluctant provincials were compelled to assume the vain title, and the real obligations, of Roman citizens. Nor was the rapacious son of Severus contented with such a measure of taxation as had appeared sufficient to his moderate predecessors. Instead of a twentieth, he exacted a tenth of all legacies and inheritances; and during his reign (for the ancient proportion was restored after his death) he crushed alike every part of the empire under the weight of his iron sceptre.

- 국역본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제국의 방방곡곡이 그의 무정한 학정 밑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의 모든 곳을 강력한 왕권으로 짓밟았다.


*알렉산데르 이후 기번은 로마의 재정과 속주 조세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 부분도 군대와 관련이 있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세금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힘이 내전으로 인해 증가하자 ˝군대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193p).
기번은, 전 속주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카라칼라 칙령을 그러한 탐욕의 발로로 해석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방탕한 생활방식 때문에 그 조세 수입마저 낭비했고, 모든 로마 제국이 그의 학정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국역본은 내가 인용한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원문의 뉘앙스와 다르게 옮겼다. 나는 더 직역했는데, iron sceptre는 내가 옮긴 것보다 더 나은 번역어가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 1 "Introductory: the French Prelude to Modern Historiography"

서문: 프랑스에서 나타난 근대 역사서술의 서곡

이 책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graphy)의 부상의 한 측면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쓰였다. 이 부상의 시작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른 것과 역사의 성격을 구분짓는 역사가의 기예(art), 즉 과거 사회의 제도(institution)를 재구성하고 이 제도를 당대 살았던 사람들의 행위, 말, 사상을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맥락으로 사용하는 기예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이 우리가 역사적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의 핵심임은 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역사 방법과 비교하는 수단에 의해 근대적 역사서술을 고대적 역사서술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고대 역사가들은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구성하는 기예를 발견하여 총명한 기예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당대 사회를 현대 사회에는 낯선 것으로 기술했으며 기후와 전통이 다른 맥락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신념이 얼마나 다양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과거에 인간의 행동과 사상이 현재 행동과 사상의 성격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오로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 전체가 부활하여 자세히 기술되고 과거를 해석하는 데 사용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이 존재했음을 상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를 실행할 만한 구분되고 만족스러운 방법이 있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쓴 역사는 군사적.정치적 사건에 대한 서사로 구성되었거나, 비교 정치적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과거가 적절한 탐구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는, 특별한 연구대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과거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탐구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서사를 구성하는 오래된 방식보다 우선되는, 근대적 역사서술의 지배적인 성격이다. 역사가들은 사회의 과거 단계에 들어가 연구를 마쳤을 때(그리고 오직 그때에야), 자신의 결론을 서사에 통합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그 주제는 인간과 정부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결코 변화를 멈추지 않는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주제의 두 측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역사가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서사를 만드는 기예(narrative art)로 파악된 역사, 그리고 역사서술의 역사가에 대한 일차적 중요성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가지고 그들의 관심사를 충족했다.

역사서술의 개척자로서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과거를 탐험하기 위한 특수한 기법들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과거는 그들에게 심대한 중요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파티움 히스토리쿰(spatium historicum)', 과거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의 경계의 문제를 논하지 않겠지만, 현재 주장에서 핵심적인 요점 하나는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과거에 존재하여 과거의 제도, 과념, 물질(material)과 그 문헌이 살아남아 자신들의 삶의 범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조직된 문명을,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이 과거를 당대와 비슷하게 의식했던 것처럼, 의식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기에는 과거의 세계라면 탐구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은 증거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들의 역사 감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탐구하고 외부의 사회와 비교함으로써 전개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우리에게 제시된 과거의 세계라는 감각,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와의 관계를 규정할 필요는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 모두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과거에 대해 파헤치는 것이 근대 유럽 역사서술의 뚜렷한 특징이라면, 우리는 분명 고대 세계에 빚을 진 유럽의 바로 그 감각의 부상과 기원을 봐야 한다.

우리의 탐구를 시작할 가장 명확한 영역은 고전적 학문 기법에서의 미묘한 변화 - 다시 말해 과거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 -로,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m)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동안 상식으로 여겨졌던 사실은, '고전 고대의 부활'(the revival of classical antiquity)과 같은 구호를, 중세 사상이 르네상스 사상만큼이나 고전적 고대에 천착했다는 사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차이는 단지, 심오하기는 하지만, 고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상에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세인과 르네상스인은 고대의 가르침과 정전(canon)을 가능한 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대를 기준으로 스스로의 형상을 갖추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종합과 알레고리화하는 정신이 채택한 방법은 전반적으로 고대의 삶을 당대의 삶 속에 상상을 통해서 혼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헥토르와 알렉산드로스를 기사로,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서 받은 재판을 봉건법의 형태에 따라 벌어진 것으로 상상했다. 더 진지하고 실천적 차원의 학문으로 가면, 로마법의 용어는 아무 망설임 없이 중세 유럽의 통치에 적용되었다. 중세인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의식했는지 결정하는 것은 현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부는 로마는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가 아니라고 느낀 이들이 확실히 있었지만, 과거의 삶이 현재와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지적하거나 이를 수행할 체계적 학문을 정초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은 꽤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이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작한 결과 이러한 경향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우발적이었고 비간접적이며 역설적이었다.

인문주의 사상은 중세인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고대 세계를 본보기로서 삼아야 할 필요를 주장했으나, 중세의 가르침을 통해 고대를 제시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텍스트가 해설, 알레고리, 해석이라는 여러 층으로 겹쳐있으며 종종 텍스트가 아니라 해설이 연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상은 순수한 텍스트로의 회귀를 요구했으며 - 그러한 외침은 이전부터 제기되었다 - 해설자보다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해야 함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 주장은 원천 자료(source-material)를 늘리고 이러한 행위를 더 잘 수행하게 할 수 있는 기법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서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문주의 운동의 역설과 진정한 중요성을 마주한다.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내놓으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세계를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대로"(as it really was) 고대로의 회귀를 요구했다는 것과는 별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근대적 역사적 의식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고는 이러한 언어들에 담긴 인문주의자의 계획을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을 완성시키는 역설이란 다음과 같다. 인문주의자는 과거를 따라하고 모방하기 위해 고대 세계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복원의 과정을 더 철저하고 정확하게 수행할수록 따라하기와 모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면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따라하기와 모방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고대는 고대 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삶으로 가져올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며, 그 결과 당대 사회와 단순하게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래의 한 연구는 고전 라틴어의 언어와 문법으로 되돌아가지만 사어(死語)로서의 라틴어를 자각하며 끝나는 인문주의자의 노력을 다시 추적했다. 이제 라틴어는 더 이상 유럽인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쓰일 수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는 점점 더 순전히 역사적 관심, 심지어 호고적(好古的) 관심사가 되었으며, 사라진 세계의 일부는 그 자체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는 이들에게만 중요해졌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이러한 과정이 라틴어 저자들이 살았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때로는 그들 고유의 눈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며 그러한 세계의 일부로서 그들의 저술을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연구 분과의 성장으로 이어졌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자는 본래의 목적을 아득히 넘어서면서 그리스 로마의 지혜를 불가피하게 과거의 것으로 전락시켰으며, 종국에는 과거가 현대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모든 주장에서 그 지혜를 박탈해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의 문제를 독립된 연구 분야로서 관심을 기울였으며 과거의 탐구를 위한 기법들을 열정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대한 연구가 별도의 과학으로 인식되는 것이 근대적 역사가의 징표라면, 그 토대를 놓은 것은 바로 인문주의자들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독립된 세계, 즉 과거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과거가 어떤 면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통해 깊게 영향을 받는다는 감각을 유럽인의 정신에서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들의 저작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라는 총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과거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가? 과거를 연구할 지점이 있는가? 현재에 생존해 있는 과거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는 어떻게 현재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역사적 변화의 문제, 고대 문명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복잡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변화의 문제는 16세기 말 직전 유럽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ography)의 시작을 기대해야 할 것은 바로 인문주의의 역설(paradox of humanism)이겠다.

인문주의자의 공헌은 유럽 학문연구의 여러 분야에서 역사적 관점과 기본적인 역사적 기법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중요성은 우리의 역사서술의 역사학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백한 무시에는 여러 원인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극단적으로 완만했으며 - 그 효과는 18세기 이전까지는 완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 과거는 도덕적 교훈을 위해 연구되어야 하며 모방하거나 피해야 할 사례들의 창고라고 계속 믿었던, 자신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던 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의 기본 원리는 종종 지적되었듯이 역사 사상의 발전을 방해했으며, 적어도 선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16세기와 17세기 역사서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전부인양 서술하는 실수가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역사상의 발전은 인문주의가 도덕주의로 휘는 경향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계속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소홀함은, 이러한 발전이 매우 다양하고 발산적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 수학, 물리학, 천문학이 과학혁명의 역사에서 중심 주제를 제공한 것 같이 - 한 두 가지 뚜렷하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학문이 빠르게 발전하고 다른 학문을 따라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학문의 주변부에서 우연히, 그리고 어쩌면 미약하게 발전하고 각각의 경우에 그 학문분과에 적합한 역사적 기법을 진화시킨 역사적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의 서술은 단일한 진화의 연구로 쓰일 수 없으며, 적어도 현재로서 가능한 것은 역사적 관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역사관의 성장을 추적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 발전한 비판적 기법은 문학적 서사의 형태로의 역사 쓰기와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늦게서야 결합했다, 한편으로는 학자(scholar)와 골동품 수집가(antiquarians) 사이의 분리(divorce),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적 역사가와의 거대한 분리가 있었다, 문학적 형태로서의 역사는 학자들에 의해 발전한 비판적 기법을 고려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유사한 기법을 발전시키지 않고도 일종의 피론주의적(pyrrhonist) 반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널리 확산된 회의주의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유유히 독자적인 길을 갔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반란의 성격은 폴 아자르(Paul Hazard)가 연구하였다. 이 반란의 지도자들의 시선은 문학적 서사라는 의미의 역사에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었으며, 마빌론(Mabillion)과 같은 학자들이 빠르게 발전시킨 과거에 관한 믿을 만한 사실을 결정하는 비판적 방법을 배제했다. 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학자들에 더 면밀히 관심을 가졌다면, 피론주의적 절망의 강도가 덜했을지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오류를 현대의 역사가들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역사라는 제목을 단 문학 작품의 역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처럼 연구되었으며, 그 결과 일방적인 관점이 생겨나 서사적 역사를 쓰지 않은 학자들의 저작의 중요성에 충분한 중요성을 거의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후기의 요한 하위징아(Johan Hauizinga)는 모든 근대 학문의 역사는 중세 대학에 거의 빚진바가 없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러한 예외를 제외하면, 하위징아는 근대 학문은 신학, 의학 또는 법학이라는 세 중요 학부 중 하나 또는 삼학(trivium)이나 사과(quadrivium)라는 하위 기예의 하나에서 싹을 틔우는 과정을 통해 발전했다고 말했는데, 역사학이 중세의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면 수사학의 하위분과이나 비판적 목적이나 방법 없는 단순한 낭독 형식으로서 드러났던 것이며 그 결과 역사학의 비판적 학문으로의 발달은 완전히 대학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그 이름을 낳는 문학적 형태와 역사를 동일시하기로 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 다양한 표준 저작을 통해 잘 알려진 - 다음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즉 최고의 독창성과 복잡성을 지닌 비서사적인 역사학 저작은 16세기 - 이 시대는 대학 조직과 커리큘럼이 여전히 매우 중세적이었다 - 프랑스 대학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상은 법학부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사법적 역사학파는 이 장 나머지 부분의 주제를 이루지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은, 16세기와 17세기 학자들의 공헌이 서사적 역사와 결합하여 오늘날의 역사학 저술과 상당히 유사한 저술을 생산했다면 그 공헌은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나 기번(Edward Gibbon) 같은 거인들이 사용했을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의 방대한 축적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초창기의 학자들은 사실을 역사적 맥락으로 되돌려 사실을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미 제시한 바 있듯이 이는 역사적 반성(reflexion)에 대한 복잡한 문제, 즉 과거와 현재의 과거 및 현재에서의 과거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법률가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특별히 더 중요했는데, 그들이 과거의 맥락에 부여하는 자료들은 동시에 현재 사회가 스스로를 통치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학자들이 우려했던 역사적 문제는 성숙하고, 시급성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이었으며 심지어 철학적으로 심오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사상은 그 자신과 더불에 그의 세대에 매우 중요했을 수 있으며, 자신의 문명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사상은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더 읽을 책














특히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과 <역사와 역사가들>은 

서양과 중국의 역사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수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각주의 역사>는 위에 번역한 부분을 각주라는 학문적 기법을 통해서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어 지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책이다.


<코젤렉 개념사 사전: 역사>는 '역사'라는 개념이 변화한 역사이니 참고용으로 보면 좋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도 같이 읽으면, 서양에서 역사인식의 변화를 더 거시적인 역사적 변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부이야기 5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쌍둥이 자매와 형제의 결혼식 장면, 카르르크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져 가는 아미르. 달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uring a long period of two hundred and twenty years, from the establishment of this artful system to the death of Commodus, the dangers inherent to a military government were, in a great measure, suspended. The soldiers were seldom roused to that fatal sense of their own strength, and of the weakness of the civil authority, which was, before and afterwards, productive of such dreadful calamities.


- 국내 번역본

이 교묘한 체제가 확립된 후부터 콤모두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2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군사정부에 내재한 위험은 억제되고 있었다. 군대는 자신들의 막강한 힘이나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치명적인 재앙을 몰고 왔던 민간 정부의 허약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다.


- 번역문 수정

이 교묘한 체제가 확립된 후부터 콤모두스가 사망할 때까지 2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군사정부에 내재한 위험은 상당히 유보되고 있었다. 군대는 자신들의 막강한 힘이나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치명적인 재앙을 몰고 왔던 시민적 권위의 허약성에 대해 자각하지 못했다.


국내 번역본은 'in a great measure는 번역하지 않았다. suspend는 '억제하다'로 번역하면, 로마 정부에 내재한 위험이 터지는 것을 누군가 적극적으로 억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 단락을 보면 그저 콤모두스 사망 이전까지는 군대의 폭력적인 개입이 거의 없었다는 설명이 뒤따라오고 있다. 그러므로 suspend는 유보되다, 유예되다 정도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애초에 suspend의 사전적 의미 중에는 '억제하다'는 없기도 하다.

Civil Authority는 '시민적 권위'라고 했는데, civil의 뜻 중에 '(군대, 종교와 대비하여) 민간의'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역자들처럼 '민간의 권위'라고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렇지만 authority를 권위가 아닌 정부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These words seem to have been the constitutional language.

- 국내 번역본

이 구절은 로마법에서 용어를 빌려 온 것이다. (81p 기번의 주석 18)


이 주석이 들어간 원문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원로원의 권위와 병사들의 동의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군대는 자신들의 충성 서약을 존중했다." (The emperor was elected by the authority of the senate and the consent of the soldiers. The legions respected their oath of fidelity.)


원문 내용과 꽤 달라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꽤 걸렸다. 위키백과를 조사하며, 역자들의 개념 이해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constitutional language'가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constitutio(영어로 constitution)은 황제에 의한 법률 제정을 가리키는 말로, 로마법에 규정되어 있다. 역자들은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은 번역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내 해석이 맞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constitution이라는 단어는 헌법, 헌정, 체제 등의 의미가 있다. <국가>로 옮겨지는 플라톤의 Politeia(정확한 번역어는 체제)를 영어로 옮기면 Constitution이다. '체제'라는 뜻에 주목한다면, constitutional language'는 체제의 언어가 될 텐데, 나는 이것이 공화정 체제의 언어를 기번이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로마의 황제는 원로원의 결의와 민회의 선포를 통해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는 공화정기 로마에서 집정관이 선출될 때 관행을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온 것이다. 황제는 원로원의 권위와 병사의 동의에 의해 선출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자들의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며, 나는 "이 구절은 공화정 체제의 언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로 수정하겠다.


- 국역본

티투스 황제의 온화한 통치 하에서 로마는 일시적이나마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애정 어린 기억 덕분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15년간이나 보호받을 수 있었다.


- 번역 수정

티투스의 온화한 관리 하에서 로마는 일시적이나마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고, 티투스에 대한 애정 어린 기억 덕분에 동생인 도미티아누스의 악덕은 15년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원문에서 빠진 부분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그'he, '그녀'she, 그것it 등의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데, 한국어로 옮길 때 지칭대상을 명확히 해주지 않으면 번역투스러워진다. 그래서 반드시 대명사를 고수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he나 it의 대상을 풀어서 쓰는 게 한국어로 읽을 때는 자연스럽다.


- 국역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전체에 질서와 평화를 전파했다. 그의 시대는 역사에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은 시대로 손꼽히는데, 사실 역사란 인간의 범죄와 우행과 불행의 기록에 다름 아닌 것이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영예라 하겠다. 사생활에서의 그는 선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소박해서 허영이나 위선을 몰랐다. 그는 지위에서 비롯되는 편의나 악의 없는 쾌락들은 적당히 누릴 줄도 알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유쾌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번역문 수정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전체에 질서와 평화를 전파했다. 그의 시대는 역사에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은 시대로 손꼽히는데, 사실 역사란 인간의 범죄와 우행과 불행의 기록에 다름 아닌 것이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영예라 하겠다. 사생활에서의 그는 선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소박해서 허영이나 위선을 몰랐다. 그는 재산에서 비롯되는 편의나 지위(society)에서 오는 악의 없는 쾌락들은 적당히 누릴 줄도 알았고, 자비로운 마음과 유쾌하면서도 차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빠진 부분도 채워서 번역을 수정했다. 그리고 번역할 때 character(성격), temper(기질), humour(체질, 체액) disposition(성향), tendency(경향) 등은 단어를 구분해서 써야 한다.




- 국역본

소란한 병영에서 기록한 그의 <명상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현자의 겸손이나 황제의 권위와는 다소 동떨어진 방식으로 공개 철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삶 자체가 제논의 교훈에 대한 고귀한 해설이었다.


*각주 28: 게르마니아 2차 원정에 앞서 그는 3일 동안 로마 시민들에게 철학 강연을 했다. 그리스와 아시아의 도시들에서도 이미 대중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건 어떻게 고쳐야할지 모르겠다.. 



- 국역본

음험하고 냉혹했던 티베리우스, 미친 칼리굴라, 허약했던 클라우디우스, 방탕하고 잔인했던 네로, 짐승 같았던 비텔리우스, 소심하고 비인간적인 도미티아누스는 영원한 수치로 역사에 남았다.


- 번역문 수정

음험하고 냉혹한 티베리우스, 광포한 칼리굴라, 유약한 클라우디우스, 방탕하고 잔인한 네로, 짐승 같은 비텔리우스, 소심하고 비인간적인 도미티아누스는 영원한 수치로서 비난받았다.


    -국역본

    로마 제국은 전 세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제국이 한 사람의 수중에 있다면 그 사람의 적들에게는 전 세계가 황량한 감옥이 되는 셈이었다. 전제 정치의 노예들은 로마와 원로원에서 화려한 금빛 쇠사슬을 끌고 다니든 세리푸스 섬의 불모의 바위나 얼어붙은 도나우 강변에서 추방의 삶을 살든, 결국에는 똑같이 철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번역문 수정

    로마 제국은 전 세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제국이 한 사람의 수중에 있다면 그 사람의 적들에게는 전 세계가 삼엄하고 황량한 감옥이 되는 셈이었다. 제국적 전제 정치의 노예들은 로마와 원로원에서 화려한 금빛 쇠사슬을 끌고 다니든 세리푸스 섬의 불모의 바위나 얼어붙은 도나우 강변에서 추방의 삶을 살든, 결국에는 똑같이 철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장 안토니누스 가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



    The obvious denition of a monarchy seems to be that of a state, in which a single person, by whatsoever name he may be distinguished, is intrusted with the execution of the laws, the management of the revenue, and the command of the army. But unless public liberty is protected by intrepid and vigilant guardians, the authority of so formidable a magistrate will soon degenerate into despotism. The inuence of the clergy, in an age of superstition, might be usefully employed to assert the rights of mankind; but so intimate is the connexion between the throne and the altar, that the banner of the church has very seldom been seen on the side of the people. A martial nobility and stubborn commons, possessed of arms, tenacious of property, and collected into constitutional assemblies, form the only balance capable of preserving a free constitution against enterprises of an aspiring prince.

    - 국내 번역문

    군주정이란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든 한 사람에게 법률 집행과 세입 관리와 군대 통솔권이 모두 위임되어 있는 국가의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감시인들이 시민적 자유를 빈틈없이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막강한 권력을 지닌 행정관을 곧 독재자로 전락하고 만다. 미신적인 시대에는 성직자의 영향력을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게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자와 성직자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일반 국민의 편에 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용감한 귀족과 완고한 평민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자신의 재산을 굳건히 지키면서 입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만이 야심 많은 군주의 계획에 대항해서 자유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견제 방법이었다. (65p)

    - 번역문 수정

    군주정의 명확한 정의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든 세입 관리와 군대 통솔권이 모두 위임되어 있는 국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가진 감시인들이 공적 자유(or 대중의 자유?)를 빈틈없이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막강한 권위를 지닌 행정관은 곧 전제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미신적인 시대에는 성직자의 영향력을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게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권좌와 제단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인민의 편에 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용감한 귀족과 완고한 평민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자신의 재산을 굳건히 지키면서 입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만이 야심 많은 군주의 계획에 대항해서 자유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견제 방법이었다.


    1. 국내 번역본은 obvious definition으로 시작되는 부분은 번역하지 않았다.

    2. public liberty에서 public을 시민으로 번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civic, citizen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굳이 public을 시민으로 옮길 이유는 없어 보인다. 혹 18세기 후반에 public이 시민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 수 있다.

    3. authority를 권력으로 옮겼는데, 정확히는 권위다. 권력(power)와 권위는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는 개념어다. authority를 권력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나온다. "정치권력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권위와 강제되는 준수를 결합한다.(Political authority, then, combines authority proper with forced compliance.)"(데이비드 밀러, <정치철학>)

    4. 그리고 despotism도 독재자(dictator)가 아니라 전제군주 또는 전제정으로 옮겨야 정확한 번역이다. 나는 특히 정치사상 텍스트에서 despotism은 전제정 혹은 전제군주정, tyrant는 폭군 혹은 참주, tyranny는 학정, 폭정, 참주정, 독재는 dictatorship으로 고정해서 구분한다. 그런데 역자들은 이 한국어 단어들을 혼용해서 쓰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참고로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제도 Tyranny of Merit이다. 직역하면, '능력의 폭정'

    5. throne과 altar를 번역자들은 권력자와 성직자로 옮겼는데, 의미상 통할지는 모르지만 기번이 clergy라는 단어를 쓰는 와중에 altar나 throne과 같은 비유적 표현을 살리지 않고 번역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뜻만 통하게 하는 것이 번역의 다가 아닐텐데 말이다.















    Before an assembly thus modelled and prepared, Augustus pronounced a studied oration, which displayed his patriotism, and disguised his ambition.

    - 국내 번역문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재정비된 원로원 앞에서 미리 준비한 연설을 행했는데, 그것은 야심은 교묘하게 감추면서 애국심만을 강조한 연설이었다. (67p)

    - 번역문 수정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재정비된 원로원 앞에서 미리 준비한 연설을 행했는데, 그것은 애국심은 강조하면서 야심은 감춘 연설이었다.


    '교묘하게'나 '애국심만을'은 원문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역자들이 과장한 것이다.



    Imperator (from which we have derived emperor) signied under the republic no more than general, and was emphatically bestowed by the soldiers, when on the field of battle they proclaimed their victorious leader worthy of that title. When the Roman emperors assumed it in that sense, they placed it after their name, and marked how often they had taken it.

    -국내 번역문

    임페라토르에서 황제(emperor)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체제에서 임페라토르는 단순히 군대의 대장을 일컫는 용어였으며,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지도자에게 애정을 담아 바치던 칭호였다. 로마인들이 이런 의미에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때는 이름 뒤에 그 칭호를 붙였고 칭호를 받은 횟수도 기록했다. (68p 기번의 주석 3번)

    - 번역문 수정

    임페라토르(이 단어에서 황제emperor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공화정 체제에서 단순히 군대의 대장을 일컫는 용어였으며,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지도자에게 애정을 담아 바치던 칭호였다. 로마 황제들이 이런 의미에서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때는 이름 뒤에 그 칭호를 붙였고 칭호를 받은 횟수도 기록했다.




    In the consideration of the Imperial government, we have frequently mentioned the artful founder, under his well-known title of Augustus, which was not however conferred upon him till the edifice was almost completed.

    - 국내 번역문

    로마의 정부에 대해서 고찰할 때 우리는 흔히 아우구스투스라는 유명한 칭호를 가진 황제가 로마 제정을 확립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사실 체제가 거의 완성된 후에 부여되었다. (77p)

    - 번역문 수정

    제국 정부에 대해서 고찰할 때 우리는 흔히 아우구스투스라는 유명한 칭호를 가진 교묘한 창시자를 언급하는데, 사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체제가 거의 완성된 후에 부여되었다.

    출처 입력

    1. imperial government를 로마의 정부로 번역했는데, 이는 imperial=로마라는 역자들의 생각이 개입된 것이며 imperial 단어 뜻 그대로 '제국'으로 옮겨야 한다.

    2. artful founder를 황제로 번역한 것은 오역을 넘어 단어를 아예 바꾼 수준이다. 그래서 이 문장의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작문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문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It was a motive of self-preservation, not a principle of liberty, that animated the conspirators against Caligula, Nero, and Domitian. They attacked the person of the tyrant, without aiming their blow at the authority of the emperor.

    There appears, indeed, one memorable occasion, in which the senate, after seventy years of patience, made an ineectual attempt to reassume its long-forgotten rights.

    - 국내 번역본

    킬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음모를 꾸민 자들의 동기는 자유의 수호가 아니라 자기 보존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폭군 개인을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원로원이 70년간 인내한 끝에 오래전에 잊힌 권리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특별한 사건이 단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80p)

    - 번역문 수정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음모를 꾸민 자들의 동기는 자기 보존이었지 자유의 원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서 폭군 개인을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원로원이 70년간 인내한 끝에 오래전에 잊힌 권리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기억할 만한 사건이 단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1. 'principle of liberty'를 '자유의 수호'로 옮긴 것은 지나친 의역이다. '자유의 원리'쯤으로 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기번은 'A가 이 아니라 B이다' 구문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 구문은 단순히 A보다는 B에 가깝다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A를 폐기하는 적극적인 수사이다. 강조하는 것은 당연히 B이므로, 번역할 때도 기계적으로 ~가 아니라 ~이다로 하기보다는 'B였지, A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원문의 순서도 맞추면서 자동적으로 B를 강조하는 문장 구조를 택해야 한다. 이 부분은 선생님께 배운 내 개인적인 번역 원칙이다.

    2. 두 번째 문장에서 역자들은 'without'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번역을 했다.

    3. memorable을 '특별한'이 아니라 단어의 원의를 살려 '기억할 만한'으로 직역했다.

    글이 길어져서 뒷부분은 다른 글로 넘기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